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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5남 이방원은 뜻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정몽주선생을 그의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살해하여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그의 시신을 저자거리에 내다 버리고 치우지 못하게 하였다. 송악산 스님들이 몰래 시신을 수습하여 풍덕군(豊德郡)에 묘를 만들어 모셨다.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후 제3대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은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충성심을 신하들에게 강조하기 위해 정몽주를 충신이라며 복권시켜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묘를 고향인 영천(永川)에 이장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야사에 의하며는 정몽주의 묘는 1406년(태종 6년) 정몽주의 후손과 유림의 선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상여를 메고 고향 영천으로 가는 도중 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풍덕천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더니 상여앞의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 본관. 성씨등을 기록한 기)이 벗겨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명정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 보니 명정이 지금 선생의 묘소의 위치에 떨어졌다고 한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가 훌륭한 명당자리라고 하는 것이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구나 감탄하면서 경북 영천까지 가지 않고 이 곳에다 안장(安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