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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민영환 생애와 동상 이전>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은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로서 최초로 세계 주요 국가들을 일주하고 다양한 문물과 문명을 들여와 국정쇄신과 주권수호에 온 힘을 다했던 선각자이다. 선생은 17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동부승지, 대사성,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사, 군부대신, 탁지부대신등을 지내며 개혁과 자주독립의 길에 앞장섰다. 또한 1806년 특명전권대사로 러시아 리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고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 사절로 두번째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선생은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은 <<천일책>>을 저술했고, 특히 문은 혈기와 같고 무는 몸과 같으니 몸이 없으면 혈기를 보호할 수 없다면서 국방 개혁을 강조했다. 또 세계 각국과 교류하며 그들의 전략적으로 활용하는저극적인 외교가 필요하다며 다만 일본과 교류는 하되 합치지는 말고, 러사아를 사귀되 섬기지는 말라고 하면서 청국에 사대하던 일은 버리고 선린 우호 관계를 유지할것을 건의했다. 선생은 또한 공화제 사상을 계몽하고 의회제 설립을 주도했던 독립협회 운동을 지원했으며 만민공동회가 해산된 후에는 고종황제의 위상을 강하하는 데 힘썼다. 독립협회 인사들과 계속 교류하먀 자자독립의 길을 찾았고 1902년에는 이준, 이상재, 박은식, 이동희, 양기탁등과 개혁당을 조직하여 러일전쟁이 일어났을때 엄정중림을 선언하고 때를 보아 친일내각을 타도하고자 했다. 명성황후 사후에는 고종황제를 보필하며 고종황제를 보필하며 조선은행창립, 대한제국 국가제정. 화와이이민, 장충단 건립등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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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선생은 조병세 등과함께 올사오적 처단과 늑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동지들과 대궐앞에서 시위를 결했했다. 그러나 그 뜻을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직자로서 국가 수호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뼈저리게 느껴 30일 새벽에 자진 순국하였다. 이상설은 "민영환이 죽은 오늘이 바로 전국민이 죽는 날"이라고 애도했고, 전국각지 유생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며 고종황제는 그에게 충정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죽첨정이라 불렸던 이곳은, 1946년 선생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층장로로 바꾸었고,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 선생의 동상을 다시 세우게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선생이 남긴 애국 충정과 개혁의지. 그리고 책임의식이 후대에 본보기로 길이 전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