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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통영으로 이사했다. 14세 때 처음 작곡을 했고 2년 뒤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항일 운동을 전개하여 1943년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여 자유의 몸이 된 윤이상은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6년 윤이상은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서 Tony Aubin, Pierre Revel 등에게 배웠고, 1957년 독일로 옮겨 Boris Blacher, Josef Rufer 등에게 배웠다.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가하여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고, 1966년 오케스트라를 위한 <예악>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윤이상은 1967년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라는 누명을 쓰고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강제 납치되어 모진 고문과 가혹한 수형 생활을 당했다. 이응노 화백, 천상병 시인 등 34명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최고 사형 등 유죄를 선고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꾸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어 결국 이 사건을 조작했던 정권은 2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윤이상을 독일로 돌려보냈다. 윤이상은 수형생활 동안에도 <나비의 미망인>, <율>, <영상> 등을 작곡하여 세계인을 감동케 하였으나, 부끄럽게도 모국인 대한민국은 끝까지 선생을 박대하여 고향땅을 밟게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게 하였다. 고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동안, 선생은 뮌헨 올림픽 전야제에 오페라 <심청>을 초연하는 등 수많은 주옥같은 작품을 작곡하여 1987년 독일연방 정부로부터 베를린 정도 750주년 기념 대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5.18광주민주항쟁 시에는 김대중 석방운동 등을 비롯하여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2018년 베를린에 있던 윤이상선생의 묘소는 생전에 꿈에도 그린 고향땅 통영의 바닷가(통영국제음악당 바닷가언덕)로 이장 되었다. 출처 : 윤이상 평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