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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고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 안동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어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 마산지회창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고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를 내걸고 민족말살을 강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