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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휘는 진우 자는 군협이며 호는 일주 혹은 금강산인이라 하였다. 선생은 존왕양이와 척사위정의 기치를 내세우고 항일의병을 일으킨 의암 류인석 선생의 문인으로 약관 묘년에 거의에 참여하고 융희 3년 의암 선생이 13도의병 도총재로 추대되어 만주로 망명할 때도 시종 수행해가서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서기 1915년 의암 서거 후에 귀국 서울에서 서화수련을 표방하며 항일운동을 지속하다. 1919년 기미 3.1운동의 성공을 보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이 되어 활약하다가 1921년 자금조달의 밀명을 띠고 국내 잠입 도중 일경에게 피체 삼사 삼소의 고문과 3년 옥고에도 불굴하고 광복의지를 불태우며 임무를 완수해낸다. 옥고를 치루면서 자리밥을 뜯어 만든 완필 고필로 서화수련에 정진 묵죽의 당세 제1인자가 되어 항일의지와 민족혼을 묵죽에 가탁표출함으로써 지사들의 공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45년 을유 광복에 이르기까지 시주 서화의 풍류생활로 일제를 기만하며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만해 한용운 심산 김창숙 몽양 여운형 벽초 홍명희 선생 등 민족지도자들과 친교를 맺어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 책무를 수행해가는 일방 창씨개명에 불응하는 것은 물론 임진왜란에 왜적을 격파했던 서산대사의 시를 써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는 등 노골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이에 일제도 제1급 민족지도자로 치부하여 수시로 예비검속하니 옥중 생활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오호라. 광복 후 민족의 좌우분열은 선생을 불행하게 하였으니 불편부당한 선생의 순수민족주의는 시류에 용납되지 않아 1950년 경인사변에 좌우의 표적이 되어 횡화를 불면비도 강파인사로 검속되어 12월 24일 불승기한하고 옥중 영면하니 시년 68세이었다. 선생이 국망에 당하여 구국안민을 위해 부난순국하는 극적 일생을 명으로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