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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선생 사적기. 세상에 가장 고귀한 것이 생명이지마는 그 생명보다는 더 고귀한것이 정의다. 다만 정의를 위해 생명을 버리는 것은 의사들이라야 능히 할 수 일이다. 우리민족의 역사에는 의사들이 많았고 그들로써 국혼과 국맥을 이어 왔거니와 최근 세 사상이 있어서 기장 뚜어난 이는 민족의 큰 스승 의암 유인석선생이시다. 선생의 부친은 중선공 모친은 덕수이씨 헌종8년 서기 1842년 1월 27일 지금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탄생하여 어려서부터 천재의 칭송을 들어왔으며 일찍 화서 이항로선생 중암 김평묵선생 종숙 성재 유중교 선생들에게서 글을 배워 마침내 유학계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35세 때에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여 극력으로 상소했으나 뜻을 못 이루더니 을미년 서기 1895년 8월에 이르러 국모 명성황후가 왜적들어게서 시해되자 전국 각처에서 항일 구국운동이 일어나니 그때에 선생의 나이는 54세이었다. 이춘영 안승우 주용규 서상열 이필희와 신지수 이범직 등 여러 문인들이 일어나 8도창의대장에 취임해 죽기를 청하므로 선생은 제천 장담리에 대장소를 정하고 전국에 격문을 뿌려 의병들을 모았었다. 이듬해 54세때에 충주로 진격하여 왜적을 무찌르고 반역도배도 처단했으나 한편 이춘영 주용규 안승우 홍사구 등 유능하고 열렬한 장수들이 전사한 것은 선생에게 팔다리가 끊어지는 아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