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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원 선생은 공주 월송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호는 송강이며 이호언, 강덕재, 이효원, 이갑원등의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민족교육과 한글의 보존.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만주의 주요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 광한단, 정의부 등에서 활동하면서 애국.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키워내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한중공동항일투쟁의 기반을 만련하는 등 항일교육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민족교육사와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본관은 공주로 공숙공 이명덕의 18대 후손이며, 1891년 4월 11일 공주군 장기면 월송리 사송정 192번지(현, 공주시 월송동)에서 태어나 1978년 5월 1일 87세의 나이로 연길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은 공립공주보통학교(현 공주중동초등학교)를 거쳐 관립경성고등보통학교(현 서울경기고등학교)의 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유구공립보통학교(현 공주유구초등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반일교육을 하여 일제에게 위험인물로 지목되었다. 그런던 중 고등보통학교 시절에 쓴 반일사상이 담긴 일기가 발각되어 교원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을 위해 1916년 만주의 봉천성 흥경현(현 요녕성 신빈현)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한족회에 가입하여 기관지인 「한족신보」의 편집을 담당하였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현정경, 이시열, 현익철 등과 함께 광한당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을 지도, 활동하다가 1921년 경성에서 체포되어 7년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가 세운 화흥중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조선혁명당 결성에 참여, 요직을 맡아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이론과 정치사상을 전하기 위한 잡지와 출판물등을 발행.배포하여 지역의 학생과 교민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고 항일운동의 지원세력으로 견인하는 독립운동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였다. 이후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겸 정치부 집행위원장 등을 맡아 조직을 이끌던 중 1932년 1월 흥경현에서 개최된 비밀대책회의에 참석했다가 현장을 급습한 일겨에 의해 체포되어(흥경사건 또는 신빈사건) 1939년 5월까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일경의 계속되는 감시로 1945년 8월 다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광복 후에는 만주지역의 여러 단체와 학교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고 지역의 교민에게 교육을 통해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사하였으며, 중국에 있던 유해를 2001년에 봉환하여 대전현충원에 안장하여 추모하고 있다. 공주시는 애국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과 민족의 교육에 일생을 바치신 선생의 생애와 숭고한 신념을 재조명하여 되새기고 널리 알리고자 2020년 2월의 공주역사인물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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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공주 역사인물 2020년 2월 공주역사인물 이호원(李浩源, 1891~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