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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대 (당시68세) 경북 영덕군 영해읍의 선산에 안장 1936년 5월 경북 영덕 출생 1960년 재건국민운동, 농촌자원지도자 활동 1966년 영해제일고등공민학교 교사 1970년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파견 일본 연수생 1971년 영덕 여자중학교 교사 1977년 한국가톨릭농민회 경북연합회 이사 안동회장, 전국부회장 1989년 전국농민운동연합 부의장 및 전농창립준비위원장 1990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초대 의장 1991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1992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공동의장 1993년 민주항쟁기념 국민위원회 창립 5.18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활동 2004년 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지도위원 통일연대 고문 2004년 1월 4일 오전 4시 향년 67세로 운명 |292|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78년 한국가톨릭농민회 초대 안동교구연합회 회장을 시작으로 농민운 동에 투신해 ’86년 가톨릭농민회 전국부회장 등을 거친 뒤, ’90년 전농협과 전농 련으로 분리돼 있던 농민운동 진영의 통합에 나서 전농을 결성했다. ’90년부 ’93 년까지는 전농 초대 및 2대 의장을 지내며 농산물 개방 반대 운동 등을 이끌었다. 동지는 ’90년부터 ’93년까지 전농 초대 및 2대 의장을 지내며 농산물 개방 반 대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지난 ’79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농민회 회장으로 재 직시 감자농사 폐농으로 발단된‘안동농민회 사건’(일명 오원춘 사건)은 가톨릭 농민운동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YH사건과 함께 전국적인 투쟁 을 불러일으켜 부마항쟁과 10.26 박정희피살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되었던 사건 이다. 또한 ’91년부터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아 통일운동에도 헌 신해왔다. ’92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과 제3차 8.15범민족대회를 추진하다 공안 당국의 수배를 받기도 했다. 같은 해 9월에는 박형규 목사, 이돈명 변호사 등과 함께‘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의 공동의장을 맡아, 대통 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세력의 결집에 나서기도 했다. ’93년에는 고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민주항쟁기념 국민위원회’창립을 주도 해, 5.18 진상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등 5.18광주민주화 항쟁과 6.10민주화운동 의 진실 규명과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데 이바지했다. 또한 국민연합에서 우르과이라운드에 관심이 없었을 당시 이의 중요성을 함께 일깨우고 농민의 여러 단체와 연대해서 국제적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동지는 정치권의 유혹을 거절하고 시종 일관‘사회운동가’로서 전형적인 삶을 살았으며 가난한 삶이었지만 청명한 삶의 자세를 잃지 않고 이 땅의 민중을 위해 한 평생 헌신하였다. 끝내살리라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