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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504년인 서기 1895년 을미년은 여명기였다. 그해 8월에 민비가 일본공사 미우라고로가 이끄는 낭인들에게 시해당하고 단발령 강행이 겹쳐 민심을 자극시키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무력으로 일본 세력과 반항하였다. 이때 안동지역에서도 의병이 일어나자 오대의 김정석 외 수명의 의사들은 의병에 지원하였고, 의병 토벌차 온 일본군을 피하여 영양군 일월면 내당동 찰당골에 숨어 지내던 중, 대구에서 온전도인에게 기독교 복음을 받고 감화를 받아, 1904년 갑진년에 향리로 돌아와 백형 김정표 및 남승하 정성흠 김팔근 김연진과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호응을 얻고, 김정표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니 교회 창립의 시초이다. 1907년 11월 1일 주일부터 김정표 집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사랑방에서 뜻을 같이 하는 15명의 교우가 함께 예배를 드리니 교회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 4월 2일에는 교회가 부흥이 된 관계로 김정석 외 48명의 교우가 교회당 건축을 위한 특별 헌금 284냥을 모금하고, 이중에 142냥으로 학당 10칸을 매입하여 예배당으로 봉헌을 하니 1차 예배당이다. 1919년 김익현 조사가 처음으로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이 해에는 우리나라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손병희 등 33인이 일본의 쇠사슬에 벗어나고자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니 전국에 확산되었다. 임동면 챗거리와 임하면 신덕에서 극렬한 만세시위가 일어난 3월 21일에 길안면 천지에서도 오후 4시경에 시위가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길안 시위 주동자 가운데 오대교회 교인이 많았고 기독교 중심 만세운동이었다. 이미 경향 각자의 만세시위소식을 듣고 길안에서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수백 여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