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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영 선생은 충청남도 천안(天安)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 등이, 갈전면(葛田面) 아우내( 川) 장터에서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온 천지가 진동하였다. 시위군중이 여세를 몰아 헌병주재소로 접근하자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란 일본 헌병이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도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 등 19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하였다. 이때 그도 일제에 대항하다가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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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소 선생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始興郡秀岩面)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 해 3월 29일 이봉구(李鳳求)로부터 동군 화정리(花井里) 일대에 이튿날의 독립만세 운동 계획에 참가를 권하는 격문이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리(秀岩里) 비석거리(碑石洞)로 나아갔다. 여기서 그는 유익수(柳益秀)·홍순칠(洪淳七) 등과 함께 18개 동일에서 모인 2천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침 와리(瓦里) 사람들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읍내로 시위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과 함께 공립 보통학교·경찰 주재소·면사무소를 차례로 시위 행진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주동자 검거 때 체포되었으며, 이 해 5월 27일 경성(京城)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