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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으로 들어온 독립운동단체들의 면면은 공의 활동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0년 2월 공은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하셨다. 공은 3.1운동 1주년 기념식때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고재빈 등과 목포 유달산에 태극기를 꽂고 만세를 주동했다가 3월 20일 애통하게도 체포되고 말았다. 공은 경성지법에서 3년 징역형을 받아 복역하셨다.그러나 육신의 환난도 공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공은 출옥 후 송내호 선생과 더불어 신간회를 조직해 다시 구국운동에 나서셨다. 1927년 모든 국내독립운동단체들이 신간회로 통합되면서 전남도지회 부회장 겸 도대표의원을 맡으셨다. 오매불망 광복을 맞이한 이듬해 공은 한민당에 투신 광주지부위원장에 피선되셨다. 좌우대립의 해방정부에서 공은 우익세력의 지도자가 되셨다. 공은 반탁운동 반좌익운동 선봉에서 때로는 청년단체에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는 후원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진시하셨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한민당 배척정책과 한국전으로 한민당 세력이 쇠락해가자 공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독재에 정면으로 맞서셨다. 공은 1957년 야당인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이 됐고 같은 해 국민회 전남지회 위원장에 피선되셨다. 60년 3.15 부정선거때엔 참관인으로 참석했다가 자유당원과 경찰에 납치돼 테러를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셨다. 공의 열혈 우국애정은 동생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둘째 동생 병상공은 광주역장과 순천지방 철도청장을 지내시면서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앞장섰던 것이다. 세째 동생 홍재공은 광주학생사건으로 체포돼 옥사하였으며 막내 동생 홍염공은 일제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광복후 제헌국회의원과 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한 것도 형의 감화를 받은 것이었다. 독립운동에서부터 반공 반독재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애국혼으로 일관해 온 공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공은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는 통한을 머금은 채 1972년 3월 16일 운명하셨다. 영결식은 3월 2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사회장으로 엄수됐다.공은 생전인 6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으셨고 80년엔 건국포장 90년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으셨다. 공의 서거 22주기를 맞아 1994년 9월 11일 김석학이 글을 짓고 윤길중이 비제명을 써 전남 신안군 장산면 대리 선영 아래 손자를 대표하여 우범이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