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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강요와 서기 1907년 정미 7월 해아 밀사사건에 이어 고종제의 양위와 정미 7조약등 일제의 포악 무도는 치마 못할 그 도를 넘어 마침내 정미 7월의 군대해산에 이르니 국권은 빼앗기고 국운 기우는데 앞서 서기 1895년 을미에 일인의 손에 민후 시해되니 나라안 곳곳에서 서비 일어나 항일의 의병 일고 군대해산의 뒤로는 무장의병이 벌떼같이 일어나 국운을 도리키랴는 성세 자못 우람스러웠다.
이에 공은 민족의 비통을 누를 길없어 서기 1907년 정미가을 약관의 몸으로 해산 군인을 모아 향리에서 위병 이르키니 석성국 참모장이요 이양구 사정관이며 배창근 군기공급을 꾀하고 보은 김운로 낭성 신황은 손 잡던 의병장이요 청주의 맹영준 반기학 한뜻의 동지러니 그해 진천의 문백싸움을 시초로 괴산 이목리와 쌀원과 앙성 가래울에서 싸움맏가 매양 이기고 다음해 정월 초정 뒷고개의 기습작전에서는 목을 지켜 강원도로 부터 수송중인 거액의 세금을 앗고 총기를 노획하며 옥화대의 단신 싸움과 문의 남정리의 분전과 가는다리 싸움의 제승에서 용명 떨치며 군세는 호서일대를 주름잡았으나 석성국의 비장한 적진 자결은 못내 슬펐고 서기 1909년에 들어 청천과 초정싸움에 이어 전의 목천 평택 여주 횡성등지에 유격하고 문경 새재 억센싸움이 의전 40여회의 마지막이 되었다.
경술년 봄 공이 뜻을 해외에 두고 떠나려던 길목 서울 남대문역에서 왜경에게 잡히어 청주에 하옥되니 다시 옮겨질 즈음 이른바 합병 특사로 출감되었고 기미년 3월 고장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차 다시 2년반의 옥고를 겪고 을유광복에 이르는 동안 걸핏하면 잡히시되 마음 굽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