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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비(忠婢)갑연(甲連)의 비. 원래 이비는 용흥동 연화재 중턱 부근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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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 순조30년(1830년). 경상도 남쪽지역 연일현(延日縣)에 송(宋)과부란 여인이 여관을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송과부를 연약한 여자라고 업신여기고, 그 업을 뺏으려고 하는 불량배가 있었는데, 계속 심한 능욕을 해오자 송 과부는 수치심과 울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강물에 투신했다. 이때 송 과부의 몸종인 갑연(24세)이 울부짖으며 쫓아가 "주인께서 돌아가시면 저는 어찌 혼자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바로 강물에 뛰어 들어 주인을 물위로 떠오르게 하자 뱃사람 여럿이서 이를 도와 구해 내니 송 과부는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갑연은 급물살에 휩쓸려 배 밑으로 떠밀려 들어가 죽고 말았다. 이때 마을 사람과 배에 잇던 모든 상인들이 그 광경을 보고 가상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연일현청에 달려가 이를 알리니, 연일현청에서는 다시 경상도 감영에 보고하였다. 이때 안절사(按節使), 즉 암행어사가 되어 경상도 지방을 순창하던 박기수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안타깝게 여겨 상세히 조사한 후 조정에 보고를 하니 순조 임금이 그 충절을 가상히 여거 정표(旌表)토록 명을 내렸다. 이에 고들 사람들이 갑연의 아름다운 충절을 소중히 여겨 성금을 거두고 돌을 세워 놓고 후세에 길이길이 전해질 수 있도록 글을 지어 달라고 간절히 소망했다. 이에 암행어사 박기수가 비문의 글을 짓고, 홍문관 제학 '이면승'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워 놓게 된 것이다. 그녀의 넋과 아름다운 충절을 기리고 그 미담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워 놓은 충비갑연지비(忠婢甲連之碑)를 보면, 비록 천한 몸종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뜻을 공덕비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했던 당시의 조상들도 파격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만은 않다. 그 만큼 어렵기도 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늘은 벌써부터 너를 홀로 두지 않았거늘 어찌 너만 혼자 죽게 하겠는가. 죽어서 그 마을에 정표하고 그 물가에 비(碑)를 세우니 누가 너를 비(婢)라 말하리오" - 열린포항 2003년 겨울호 참조 출처 : 포항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