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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한국불교학 53집 가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대회 연기 소식을 접한 독일 한인유학생 단체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한국의 실상을 알릴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 사는 대회 성과에 대한 기대를 한층 높혔다. 今番 이 會議와 博覽會가 當初의 그 企圖대로 結果에 잇서서 好成績 을 나타내여 天下人士에게 現代와가치 正義와 人道의 소리가 一種의 假 裝的 標語가 되어잇고 人間社會의 裏面은 依然히 暗澹하며 慘酷한 地境 에 陷하여잇는 事情을 如實히 가라처주게 된다 하면 그 功績은 實로 偉 大할지니 虛僞와 詭譎이 업고 正義와 人道의 觀念이 强者의 그것보다 徹 底한 弱貧한 民族의 부르지짐을 公開한이만큼 우리 人類社會의 平和運動 을 爲하야 는 人間性의 反面인 掠奪, 搾取, 壓迫 等 惡性除去를 爲하야 警告가 될 것이오 러서 貢獻과 實益이 크리라고 밋는 바이다. 39) 대회소식을 유덕고려학우회의 이극로에게 가장 먼저 알린 사람은 金 俊淵(1895-1971)이다. 40) 그는 유덕고려학우회 임원 출신으로서, 1925년 에는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소련을 시찰하고,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를 지냈다. 유덕고려학우회의 핵심 인물인 이극로는 프랑스에 있는 지인 정석해에게도 대회 개최 소식을 전했다. 41) 이에 파리한인회 회장 을 맡고 있던 김법린이 대표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42) 파리한인회는 巴 里韓人親睦會로 보이는데, 프랑스에는 在法韓國民會가 1919년 11월에 결성되어 1923년 6월까지 존속되었고, 홍재하에 의해 파리한인친목회로 재정비되었다. 김법린은 1926년 7월 대학을 졸업한 뒤, 은행에 근무하면 서 대학원에 진학한 상황이었다. 38) 동아일보 , 1926.9.10일자, 「國際反帝國主義大同盟 獨逸伯林에서 開催」. 39) 동아일보 , 1926.12.17일자, 「被壓迫民族大會」. 40) 이극로(1947), 苦鬪四十年 , 서울, 을유문화사, pp.36-37. 41) 서산정석해간행위원회(1989) p.87. 42) 김법린(1963) p.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