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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월 3일 고향에서 백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동년 8월 10일경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李賢壽)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자유신보(自由申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이현수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에 이르기까지 서장환(徐章煥)·정팔진(丁八鎭)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영천·대구·경주지방의 관공서와 도로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이들은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1923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23년 1월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