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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룡 (당시63세) 화 장 1939년 10월 3일 전남 장흥 출생 1985년 신한민주당 도봉지구당 부위원장 1993년 1월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민자통) 가입 1994년 범민련 서울시연합 감사 1998년 6월 제9차 범민족대회 서울지역 추진본부 본부장 1998년 11월 민자통 서울회의 의장 1999년 6월 99 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서울지역 추진본부 집행위원장 1999년 8월 15일 99 통일대축전 10차 범민족대회 구속 방침 관련 명동성당 농성 1999년 12월 명동성당 농성 중 구속. 청주교도소 복역 2001년 3월 전국연합 서울연합 공동의장 옥중 선출 2001년 3월 범민련 서울시연합 부의장 옥중 선출 2001년 5월 4일 1년 6개월 형을 마치고 청주교도소에서 출소 2001년 3월 범민련 서울시연합 부의장. 전국연합 서울연합 공동의장 2001년 7월 31일 6.15 공동선언실천 통일대행진단 서군 단장 2001년 8월 15일 2001 민족통일대축전 방북대표단 2001년 8월 21일 김포공항에서 연행 2001년 8월 23일 국가보안법 상의 잠입∙탈출, 회합∙통신으로 구속 2001년10월 18일 폐암말기 진단으로 구속형집행정지로 출소 2002년 8월 25일 오전 9시 운명 |276|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동지는 일제 식민지 시기에 남녘땅 가난한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노 동자로서, 통일운동가로서 살아왔다. 자기 노동에 충실함으로써 언제나 당당했 으며 특히 가진 자들의 횡포나 오만방자한 행위에 대하여는 오연한 자세로 압도 해버렸던 동지는 식민지 땅 세상살이를 서러운 노동자로 출발하여 자랑스러운 통일애국지사로 우뚝 서게 되었다. 동지는 ’90년대 이후 줄곧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 앞장서 왔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당국에 의해 투옥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지난 ’01년에도 민족통일대축전 남측대표단으로 합법적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동지는 어이없게 도 정부당국의 정략적인 민간통일운동 탄압에 희생되어 구속되었다. 이 고초로 동지는 폐암이 악화되어 운명할 때까지 병마와 싸워야 했다. 동지는 죽는 날까지 통일운동에 앞장서서 투쟁하였고 몸을 사리지 않는 행동 가, 조직에 충실한 운동가의 풍모를 보여주어 많은 동지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 었다. 동지는 죽음을 앞두고 유해 가운데 가능한 부위는 필요한 동포에게 기증하고 나머지는 화장한 후 무덤도 만들지 말고 임진강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통 일애국지사로서의 장엄한 삶을 마쳤다. 식민지 땅 세상살이를 서러운 노동자로 출발하시어 저 밑바닥 생활노동자로 일관하시다가 드디어자랑스러운통일노동자로우뚝선문재룡동지여! 민중의바다에, 아니바다밑보다더낮은곳에늘자리하시던민족통일민중사랑문재룡동 지여! 당신주먹으로당신가슴팍을치며간절히호소하던이말씀을영원히잊을수없습니다. “힘으로내땅을점령해들어와, 힘으로내땅을갈라놓고살육전을벌인다음, 힘으로국방 자위권을빼앗고정치사회경제문화모든영역에서완벽하게이땅을지배해버린제국주의 아메리카입니다. 분단된예속의땅에서노동자농민은저들의수탈대상으로부터단한치도벗 어나지못합니다. 이런내조국에서진정노동해방을원하신다면진정농민해방을바라신다면 무엇보다먼저자주통일에떨쳐나서야한다이말입니다. 분단예속을그대로두고서민중해방 을구한다는것은마치나무에올라가물고기를얻자는것과같습니다. 살기위해서는저와같 은노동자와누구보다앞장서서절실하게이를받아안고 떨쳐나서야합니다. 농민도마찬가 지아니겠습니까?” - 오종렬전국연합의장의추모사중에서- 끝내살리라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