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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강릉인으로 군수공파의 19세손이니 휘는 강원이며 자는 경근이고 호는 송암이다. 1877 정축년 9월 20일 부 한련과 모 밀양변씨의 장자로 출생하여 강화에서 성장하였으며 20세에 김해김씨 마리아와 결혼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강화군 개풍군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시고 동교 교장으로 재직하시면서 후세에게 민족사상을 교육하시였고 1919 기미년 3.1운동에는 강화 및 김포의 지휘관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시던 중 일본경찰에 체포되여 옥고를 치루시다가 병으로 보석되었으며 1920 경신년 미국 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광복단 군영 특파결사단의 활동을 돕기 위하여 무기를 서울 내자동 자가에 은닉하시는 등 활동을 하시였고 그 후 노령 해삼위로 망명하시어 이동휘 선생이 운영하던 군관학교에 사재를 헌납하고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과 지원병을 모집하시어 해삼위로 보내시다가 피체되어 3년 반의 형을 받고 복역하시였읍니다. 광복후에는 강화보민회 회장으로 있으시면서 강화특공대를 적극 후원하시어 6.25 동란 시 향토수호에 기여하시는 등 일생을 조국의 독립정신으로 위국헌신하시다가 1956 병신년 12월 3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시어 이곳 봉산에 안장되시었읍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신 공을 기리어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1988 무진년 묘비를 건립케됨에 따라 경건한 마음으로 선생의 은덕을 재삼 추모합니다. 1988 무진년 8월 17일 곡촌 홍재현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