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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투쟁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성진회, 독서회, 소녀회 사건등으로 검거 투옥된 학생들과 사회단테 지도자들로 광주형무소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투옥된 학생들은 옥중에서도 일제의 재판 지연과 구문.가혹행위에 대항해 집단 또는 개인적으로 구호. 단식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투쟁했다.
1930년 3월 1일 수감 학생들은 감방 벽을 두드리는 신호에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7월 7일에는 김보섭이 말소리가 크다며 휘두르는 간수의 대검에 안면이 찔리자 형무소 5개 건물 150개 감방에 있던 수백 명의 학생과 일반 죄수들이 3일 동안 독립만세를 부르며 농성했다. 학생들이 옥중 시위를 벌일 떄면 시민들 또한 형무소로 몰려와 무지막지한 탄압을 중지하도록 호소하면서 옥내투쟁에 호응했다.
일제 형리의 포악무도한 폭행을 당할 때마다 수감 학생들은 분노로 치를 떨며 망국의 설움을 죽음으로써 항거하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하기도 했는데 계속된 단식투쟁으로 수십명의 학생들이 빈사 상태에 이르자 당황한 형무소 당국은 항문으로 강제 급식으로 하여 빈사 학생들을 소생시키고 유화책으로 학생들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