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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랑 논개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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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영솔하여 진주 남문내에 이르러 종소리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군중을 지도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벗어나 서울로 달려가 광복단에 입단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된 문서와 권총을 입수해 귀향하였고 1920년 후반부터 강기수 홍종석 등과 함께 산청군 단성면과 도산면 일원에서 임시정부와 태평양회의를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전달하였다. 1921년 9월 28일에는 산청군 생비량면 가계리에서 일본순사와 서로 총격전을 전개하여 중상을 입히는 등 맹활약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22년 1월에 부산지법 진주지청에서 징역 6년형이 언도되었고 1924년 4월 감형처분을 받아 4년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선생의 자손들이 1982년부터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명석면사무소에서 감형통지서와 수형인명부를 찾았을 뿐 구체적 활동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수년전 소생을 찾아와 명예회복의 방법을 호소하므로 서울 부산 등지로 왕래하면서 드디어 동아일보 1921년 10월 13일자를 찾으니 산청지방에 독립단 2명 각처에서 대활동이란 제목이었고 또 동아일보 1922년 2월 14일자를 찾으니 산청에 순사저격한 김용익 검사국 송치라는 제목 이었다. 이 같은 자료를 정리해 포상신청한 결과 마침내 2009년 8월 15이 광복절에 항일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고자 명석면 노인회와 이장단이 협의하여 명석면민의 이름으로 공적을 기리고 영구히 선양하고자 정성을 모아 깊이 새기게 되었다. 선생은 1970년 경술 3월 10일 향리에서 춘추 85세에 별세하셨지만 아름답고 훌륭한 위훈이 태양같이 빛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