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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06년(광무 10) 대구계성중학교 재학중, 배일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동교를 중퇴하고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후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경성연합의전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이듬해 2월 12일 및 14일에 이갑성(李甲成)의 초청으로 경성연합의전 구내의 이갑성의 자택에서 음악회를 빙자하여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璣)·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2월 26일에는 경상남도의 민족대표를 추진하기 위하여 마산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3월 1일에는 종로에서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3월 5일에도 계속해서 남대문역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듬해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