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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11월 7일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에 도해하여 순국함. 벽산 김도현 선생은 을미사변 당시 사재를 기울여 의병을 일으켜 안동, 예안, 관동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펼친 의병장으로 고장에다 영흥학교를 열어 교육으로서 백성을 일깨우려고 하신 민족의 선각자 1914 애국애족을 몸소 보여준 벽산 김도현선생 선생의 휘는 도현, 자는 명옥, 호는 벽산, 본관은 김녕이며,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소경원 참봉 성하이고, 어머니는 한양조씨 언호의 따님이다. 선생은 철종 임자년(1852) 7월 14일 영상 소청리 집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밖에 나가 놀 때 모래를 모아 보루를 만들고 돌을 쌓아 성곽을 만걸거나,두 종이에 용과 범이 전투하는 모양을 그려놓고 놀았다. 31세때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성기와 병서 등을 주야로 읽어 전술을 습득하였다. 갑오년(1894) 동학들이 군사를 일으키자, 동지들을 규합하여 뒷산에 책루를 만들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때에는 사재를 기울여 무기를 마련하고 의병을 모아 안동, 함창, 예안, 관동 등지에서 적과 싸우다가 고종황제의 조서가 내려와 부득이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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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토적소를 올리려 했으나 올리지 못하고 위의 밀조를 받고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정미년(1907) 2월에 적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 그뒤 기유년(1909)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면서 예기를 축적하고 용기를 기르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한일합방이 된 후, 일본의 백성이 될 수는 없다고 하여 순국을 결심하였으나, 부친이 생존해 계셔서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갑인년(1914) 8월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니 유월(踰月)의 장례를 마친뒤, 행년 63세로 11월 7일 동짓날에 영해면 대진리 산수암 앞바다에 도해하여 순국하였다. 벽산선생은 목숨을 홍모같이 여기며 애국애족의 근본을 몸소 보여준 큰 별로 선생께서는 의병을 일으켜 기울어 가는 나라를 위해 忠을 다하였고 조강대다 영흥학교를 열어 교육을서 백성을 일꺠우려고 하신 민족의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