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page


135page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 유석 조병옥은 조선 왕조의 격량기였던 고종31년(1894년 3월 21일에 이곳 천안군 병천면 용두리에서 3.1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 조인원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양이다. 공은 1914년 평양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펜신베니아주 킹스턴시의 와이오밍 고등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을 하고 콜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경제학ㅇㄹ 전공하는 한편, 한인회, 흥사단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에는 '한국의 토지제도'라는 노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후 YMCA이사 및 신간회에 강비하여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9년 광주 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1932년 조선일보사의 전무 겸 영업국장을 지내고 1937년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다사 2년간 복역했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한국민주당을 창당, 미 군정청의 경무부장으로 잇으면서 치안 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힘썼다. 정부수립후 대통령 특사, 유엔 한국대표로서 외교구축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6.25동란때는 내무부장관으로 대구방위 전선에서 전투 지휘를 하면서 철수하라는 유엔군의 요청을 거부, 사수하여 6.25동란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1954년에 제3대 민의원에 당선, 1955년에는 민주당 조직에 참가하여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에 대표쵝위원에 피선되어 야당을 영도하였으며, 1958년에 다시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자유민주주의 실현과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신명을 바쳤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병으로 도미, 월트리드 육군병원에서 가료 중 그해 2월 15일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엄수되었고 묘소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하고 있다. 유석은 하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및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바쳐 불세지공의 업적을 남긴 독립운동가요, 정치가로서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의회 민주주의를 펼치려다 병세 악화로 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하였으니 후세의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단장을 추서한 바, 천안군에서는 공의 생애와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본받을 역사의 장으로 삼고자 생가를 복언하고 기념비를 세운다. 1995.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