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page


134page

고 열사 분성배공 정세 기념비
134page

★ 일제에 맞섰던 용감한 동생 배정세 배정세 역시 창원시 토월동에서 태어나 일본 동경 입교대학 상과를 졸업한후 동경철도청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직장이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니 사직하라는 형의 권유를 받아들여 직장을 그만 둔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복이 되자 상남면 건국준비위원장직을 맡아 큰 조카인 배만갑의 집에 머물면서 일본 해군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게 되자 일본 해군이 사용할 수 없게 된 그들의 배를 이용해 일본으로 운송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으나 일부는 유출, 매각하기도 하였다. 이에 화가 난 배정세는 일본 해군 경비대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고 패전국민의 철수는 인도적으로 대우할 것이나 군수물자의 처리는 한국 재산으로 귀속시켜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 하였다. 때 마침 배정세가 경북과 밀양 폭탄사건의 주모자로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한 배중세의 동생인 점을 알고는 강제로 연행해 간 후 그날로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134page

배정세의 행방불명이 일본군의 소행이라고 단정한 조카 배만갑은 당시 미군정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미군정에서 강력한 진상조사를 명령하자 일본군은 백근 무게의 쇳덩어리를 매달아 진해 앞 바다에 수장시켰다고 실토하였다. 미군정에서 시신의 인양을 지시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배정세는 일본군의 만행 앞에 42세의 나이로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뒷날 미군에 의해 범인들 중 일부가 체포되었고, 재판장이 이유를 묻자 "상남면의 배가는 반일민족운동의 거두였기에 거류 일본인의 재산보호화 철수에 위혐을 느껴 그렇게 했다" 고 답변했다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고장에서 태어나 배중세, 정세형제는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형은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동생은 수장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출처 : 창원시 공식 블로그 창원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