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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가의 훈도를 몸에 익혀 품행이 단정신중하고 남달리 의협심이 강하며 풍모 또한 출중하여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촉망과 기대를 모았었다. 지사께서는 1910년 국욕적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상실되어 민족이 논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대의 젊은 나이에로 분연히 일어나 국권회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지셨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돌아와 향민들을 독려 운동에 앞장섰을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과 한민족의 강렬한 독립의지를 파리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는 유림 대표 독립청원서 서명사건(파리장서사건)에 일우 곽종석 회당 장석영 조부 면와 이덕후 오봉 성대제 공산 송준필 심산 김창숙선생과 함께 최연소로 적극참여하셨고 민족시인 이육사를 의열단에 권유입단케 하고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형우 배병현 고모부 김정훈등 현지의 많은 애국지사들과 연계투쟁하셨다. 또한 장진홍 의사와 함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셨다. 슬하에는 배 성봉선과의 사이에 장녀 종규를 두었고 상배후 배 김수현과의 사이에 장남 종걸 차녀 종령 남매와 손자 승호를 두었다. 그러나 선생께서 일찍이 조국광복을 위한 불굴의 투지로 항일구국전선에 투신함으로 일정한 주거도 없이 생계가 어려웠고 자녀들의 교육마저 돌보지 못하는 역경을 겪으셨다. 1945년 광복후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으로 국내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동족간의 갈등을 개탄하며 추이를 지켜보시던중 6.25전쟁이 발랍하기 몇일전에 추가하신후로 생사를 알길없이 지내왔으나 여러가지 정황을 참작하건대 불행히도 그 이듬해 8월 타계하셨음이 확실해졌다. 이렇뜻 선생께서는 가사를 돌봄이 없이 일생을 오로지 나라사랑과 헌신으로 일관하셨으며 학덕을 겸비한 고귀한 인품과 불의를 용납치 않으신 강직성은 세인의 존경을 받았었다. 선생의 구국일념의 생애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의 좌표요 귀감이 아닐 수 없으며 남기신 유덕의 여훈은 후세에 길이 빛날것이다. 이러한 선생의 숭고한 행적이 높이 평가되어 정부에서 광복50주년을 맞아 그 공훈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ㄷ가. 이에 향내 후학들은 선생의 높으신 뜻과 얼을 되새기고 추모학기위하여 유족과 함께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