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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면서 이 나라에는 진한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하였다. 대륙진출을 노리던 일본국은 드디어 친일주구들을 앞세워 강제로 을사5조약을 맺고 국제외교권을 박탈하는 한편 1907년에는 조선관군을 해산시켰으니 삼천리강산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곡성이 메아리쳤고 눈물은 흘러서 강물에 홍수를 이루었다. 그때 그 무렵 전국의 우국지사들은 의병대를 조직하여 맞싸우게 되었으니 우리고장에서는 본면 추성리 출신의 석상용 선생이 의병활동을 지휘하였는 바 그 대표적인 전투가 실상사전투와 쑥받재 그리고 벽소령 및 삼성재 전투 등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소에 담대하고 용맹하였으며 의협심이 강했던 선생은 나라 잃은 설움을 설욕하고자 적은 병력으로 일본군에게 불시기습의 유격전을 펴왔으니 그들에게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1907년 살상사에는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선생은 1908년 4월 29일(음 3월 그믐날) 캄캄한 야음을 이용해 약 50여명의 병력으로 왜군을 습격하였다. 크게 놀란 왜군은 절뜰에 쌓아둔 나뭇가리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반격하였다. 오랜 접전끝에 의병대는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으나 그후 5월 11일(음 4월 12일) 왜군들은 본면 도마리 서당에다 주민을 모아놓고 집단학살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을 당시의 본면 면장 노지현씨의 끈질긴 설득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선생이 이끄는 의병대는 1907년 말부터 5년간 지리산을 은신처로 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어 왔지만 운명의 신은 계속 선생의 곁에서 같이 해주지를 아니하였다. 1870년 11월 21일(음 10월 29일)생인 선생은 1912년 왜군에게 잡혀 진주형무소에서 5년간의 수형생활을 했고 출옥 후에는 옥중에서 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고에 시달리다가 1920년 12월 6일(음 10월 26일) 50세의 아까운 나이로 순국하시었다. 명의 유민이신 선생의 귀화사는 멀리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592년(선조 25년) 왜의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은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의 군단을 이 땅에 상륙시켜 삼천리강산을 휩쓸게 하였고 의자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는 급보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였지만 그때는 명도 북쪽 변상에서 몽고족의 일파인 오이파트 따다르족의 외침에 시달리던 때여서 원군을 파병할 여력이 없다며 이를 거절해 왔다. 그러나 그때 명의 병부상서이던 석성은 조선의 침략은 곧 명의 침략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을 펴 이여송의 원군이 오게 된 것이다. 그로인해 왜는 일단 물러갔으나 그는 그후 정적들로부터 정유재란에 대한 외교 실패라는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처형되였으며 그 후손들이 조선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 13대 종손이 석상용 선생이시다. 오늘 우리 본비 건립위원회 회원 일동은 조국광복 50주년을 맞이함에 있어 대를 이어 항일에 몸 바치신 선생의 거룩한 애국정신에 경의를 표함과 동시 삼가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길이 귀감으로 삼고자 그 내력을 이 돌에 새겨 전하는 바이다. 1995년 8월 15일 석상용 선생 전적비 건립추진위원회 회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