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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범하였다. 이에 분개한 유생들이 봉기한 것이 황해도 평산지방 선비들의 의병운동이다. 공은 대의와 용맹이 투철하여 주저함이 없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에 인격과 용맹이 있는 명장 이진룡 의사와 교분이 두터워서 항시 뜻을 같이하고 진취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왜적과 투쟁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적의 대세에 어찌할 수 없이 만주로 떠났다. 여기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전국에서 모여든 의사들과 더불어 큰 역활을 펼쳤다. 그리고 군자금을 많이 마련하고자 국내로 들어와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천일 애국지사는 가세가 부유하였으므로 토지 6만여평을 소유하고 농사를 지었었다. 나라의 주권이 없으면 나도 없다는 일념에서 군자금을 내놓기로 결심하였다. 주권회복을 하고자 정의롭게 약 3년간에 있는 토지를 전부 팔아서 군자금으로 보람잇게 받쳤다. 이는 얼마나 갸륵하고 위대한 일인가. 그러나 이 소문이 일경에게 알려져서 당내 친척 한 사람을 가두고 구타 고문을 심하게 하여 할 수 없이 군자금 보낸 사실을 실토하였다. 이때 공이 체포되어 2년간에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가정의 생활은 빈곤이 극심하였고 일제의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했다. 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은 1910년에 한국을 병탄하고 그 후에는 만주와 중국을 침략하였으며 태평양전쟁을 통해 극동 및 아시아 전역에 범죄를 저지른 후 1945년 8월 15일 일황이 항복하고 패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태평양전쟁 말기 미영소 3국 수뇌에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참전과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활점령의 비밀협정은 일본패망이 곧 우리 민족의 광복이 아니라 도리어 국토분단에 사상분열이라는 새로운 비극의 민족적 숙제를 안겨주었다. 공은 일제치하에서 큰 고통에 나날을 지냈다. 단기 4296년 서기 1993년 음 7월 7일 타계하여 황해도 평산군 서봉면 당우리 산 언덕에 모셨다. 부인은 회덕황씨인데 후덕하였으며 1986년 음력 8월 28일 세상을 마치고 묘는 합부이다. 슬하에 장남은 경선이고 자부는 창녕조씨이다. 차남 국선은 공무원 재직할 당시 극빈자 주민을 구제하여 칭송을 받았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