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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고려수문하시중익양군충의백포은정선생신도비명병서(皇明高麗守門下侍中益陽郡忠義伯圃隱鄭先生神道碑銘幷序)”라고 쓰여 있다.
圃隱先生旣沒二百八十有餘年。後學恩津宋時烈爲之說曰。道之在天下者未嘗亡。而惟其託於人者有絶續。故其行於世者。不能無明晦。此正朱夫子所謂是皆天命之所爲。非人智力之能及者也。嗚呼。若先生者豈非其人歟。先生挺豪傑之才。負特立之資。當麗運之將訖。其盡瘁所事。臣道畢備者。固已垂諸冊書。與古人幷駕。麗氏之有先生。豈不幸歟。雖然。先 生天爲我東生之也。我東僻處夷服中。至周武王時。殷太師來爲君長。八敎是施。是必宗其祖舜司徒之敬敷者。然繼作者。無有聞焉。歷二千餘年。迹熄言堙。將隨世而益下矣。當胡元之世。天下腥羶。至於東土。則又彝倫益斁。誠亂極思治之日也。先生以妥歡帖睦爾之五年丁丑十二月戊子生焉。歿於洪武壬申四月初四日。葬於龍仁慕賢村文秀山辰坐戌向之原。諱夢周。字達可。自未生時。已有嘉徵。稍長。卽慕聖賢之學。父母喪。皆廬墓終制。雖其非禮之正。然食稻衣錦。供佛飯僧之俗。漸變其舊矣。衣冠文物。遵用 華制。以革鞮屨卉裳之陋。則用夏變夷之漸。已見於此矣。講書談理。主於朱子。而橫說豎說。無不脗合。則不但古註之支離紛挐者。不能以誤人。而如江西永嘉之似是而非者。亦無所售焉。則有如百川歸海。衆星拱極矣。用家禮立祠堂。而祭祀之禮正。拒北虜歸義主。而春秋之法明。蓋其宏綱大用。皆可以質鬼神而無疑。俟百世而不惑矣。是故本朝諸儒。得有以推本演繹。其道學淵源典章文物。沿泝乎洛建而浸淫乎殷周者。皆祖於先生。則其制治保邦盡忠成仁者。寔先生之餘事也。本朝自國初。漸加褒尙。至我中 廟朝。靜庵諸賢出而益加闡明。遂以從祀文廟。則崇報之典。至矣盡矣。然若與薛,崔,安諸賢。爲同條共貫。則尙論者或不厭也。惟禑,昌之際。史多闕文。故先生進退之義。後人或有疑焉者。然先生義精仁熟。以道周旋。君子之所爲。豈衆人之所知哉。昔有以問於退溪李先生者。先生曰。當於有過中求無過。不當於無過中求有過。斯至論也。嗚呼。先生盡心危邦。卒以身殉。則其忠盛矣。喪祭之禮。能變舊俗。則其孝大矣。然自古篤於忠孝者。世不乏人。則先生之忠與孝。猶有其倫矣。其斥胡元歸皇朝。用華制變胡俗。使我東 土爲中國之屬國。而蔚然爲禮義之邦者。是非先生之大功乎。然考之春秋。則弦黃諸國。遠隔荊楚。慕向中國。以至滅亡而不悔者有之。則先生之功。亦不能以專美矣。唯其以儒者之學爲己任。而其爲學也。必以朱子爲宗。使後之學者。皆知主敬以立其本。窮理以致其知。反躬以踐其實。此三者爲聖學之體要。則其功孰與之侔竝哉。且夫自朱子以後。中朝之道學。分裂岐貳。陽明,白沙之徒。以荒唐隱僻之說。思有以易天下。而洙泗洛閩之宗脈。晦塞而不傳。此其害甚於洪水猛獸之禍矣。獨我東土。擇之也精。守之也專。 訖無支分派別之惑。此雖後先生而賢者之功。而至若尋源泝本。則捨先生其誰哉。故前後尙論之士。莫不曰先生東方理學之宗。斯乃士林之公言也。昔文中子曰。通於夫子受罔極之恩。東土之士。於先生亦當如此云。嗚呼。此實天爲我東。篤生哲人。以啓道學之淵源。使絶者續晦者明。嗚呼。此豈人智力之所及也哉。先生延日人。上祖襲明。麗朝以名儒。官止樞密院知奏事。曾祖仁壽。祖裕。考云瓘。俱贈顯官。妣李氏。署丞約之女也。先生二子宗誠,宗本。光廟朝。有名保者。與六臣友善。逮其獄起。保常慷慨。往省其庶妹 爲韓明澮之妾者曰。公安往。曰詣闕鞫獄也。曰公當爲萬世罪人。明澮聞之。卽詣闕告上親鞫之。保曰。常以成三問,朴彭年爲正人君子。故實有是言。上命轘之。左右曰。是鄭某之孫也。上遽命減死曰。忠臣之後。只竄迎日。亦可謂尙其類也。世愈遠益不振。識者疑焉。自近世以來。漸至蕃昌。其最顯者。右議政維城,判中樞應聖,寅平尉齊賢,統制使榏,統制使傅賢,同知倜。其奉先生祀者。朝廷例加錄用。今尙瑞直長纘光。於先生爲十一代孫也。古人有言曰。開千眼者必有後。於此亦可以見先生也。銘曰。堪輿磅礴。一理充塞。風氣周旋。開有後先。昔者全閩。一蠻夷區。洎紫陽生。爲魯爲鄒。惟此東方。寔惟九夷。父師之後。八敎漸微。勝國謠俗。猶是椎髻。惟我先生。崛起其季。豪傑之才。純粹之體。不由師承。默與道契。修之於己。行滿鄕里。行之於國。風動遐邇。庠序旣設。俎豆莘莘。士誦詩書。民趨作新。當時天下。陸沈胡虜。維茲用夏。周禮在魯。義主攘夷。背陰向明。春秋大義。炳如日星。未盡底蘊。天柱忽傾。其身旣沒。其道益壽。若山有岱。如北有斗。蓋先生道。乃紫陽學。祖述憲章。躬行心得。其在丈席。攘斥百家。橫說豎說。一此無他。 第所論說。聽者疑惑。及得胡通。無不符合。地遠世後。若航斷港。因言得意。痕血摑捧。爾後諸賢。承繼張皇。歷選前後。其功莫當。若宋濂翁。始建圖書。以授關洛。以傳閩甌。此殆天啓。統會宗元。凡我後學。永泝其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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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해설
포은 선생이 가신 지 280여 년 만에 후학 은진(恩津) 송시열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대저 도(道)란 천하를 상대로는 없어진 적이 없으나, 사람을 상대로는 끊이고 이어지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도가 세상에 행하여지는 데는 밝고 어두운 시대가 없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이는 다 천명에 좌우되는 것이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칠 바가 아니다.”는 것이다. 아, 선생 같은 이야 어찌 여기에 해당하는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호걸스런 재주와 우뚝 선 자질로 고려의 말기에 나서 그 임금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원만한 신하의 도리가 이미 사책(史冊)에 전해져 고인들과 맞설 수 있으니, 고려에 선생 같은 분이 있었다는 것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선생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낸 분이다. 우리나라가 본시 외딴 지역에 위치해 있다가 주 무왕(周武王) 시대에 은(殷) 나라 태사(太師)가 와서 군장(君長)이 되어 팔조(八條)의 교화(敎化)를 폈으니, 이는 반드시 그 시조인 순 임금 때 사도(司徒 설(契))의 오교(五敎)를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태사의 업적을 계승한 이가 없어 2천여 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그 유택(遺澤)이 식어가고 그 말씀이 인멸되어,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오륜(五倫)의 가르침이 저하되어갈 형편이었다. 더욱이 호원(胡元) 시대가 되어서는 온 천하에 성전(腥羶)이 충만하였고 우리나라도 강상(綱常)이 더욱 퇴패되었으니, 이는 진정 난(亂)이 극도에 이르면 다시 치(治)로 돌아오는 시기이기도 하였다.선생은 타환첩목이(妥歡帖睦爾 원 순제(元順帝)) 3년(1337, 충숙왕 복위6) 12월 22일에 나서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 25년(1392) 4월 4일에 별세했고, 용인(龍仁) 모현촌(慕賢村) 문수산(文秀山) 진좌술향(辰坐戌向)의 묘에 안장되었다.선생의 휘(諱)는 몽주(夢周), 자(字)는 달가(達可)이다. 출생하기도 전에 이미 아름다운 조짐이 있었고, 조금 자라서는 바로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초막(草幕)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으니, 이것이 아무리 정례(正禮)는 아니나, 상중(喪中)에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부처에게 물건을 바치고 중에게 음식을 먹이던 풍습을 점차 달라지게 하였다. 의관 문물(衣冠文物)에는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여 제구(鞮屨)ㆍ훼상(卉裳 풀로 짠 호인의 의상)의 누속(陋俗)을 고쳤으니, 중화(中華)로써 이적(夷狄)을 변화시키는 조짐이 이미 여기에 나타났다. 글을 강론하고 이치를 말하는 데는 주자(朱子)를 조종으로 하여 횡설수설(橫說竪說)해 놓은 것이 모두 호씨(胡氏)의 설(說)과 부합되었으니, 지리멸렬(支離滅裂)한 고주(古注)가 배우는 이를 그르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이비(似而非)한 강서(江西)ㆍ영가(永嘉)의 무리도 쓸모가 없게 되어, 마치 온 내[川]가 바다로 돌아가고 여러 별[星]이 북극(北極)으로 향하듯 하였다. 그리고 《가례(家禮)》를 따르고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하는 예(禮)가 시정되었고, 북로(北虜)를 거절하고 의주(義主)에게 돌아가 《춘추(春秋)》의 법이 밝았으니, 그 굉대(宏大)한 체(體)와 용(用)이 다 귀신에게 질정해도 의심이 없고 후세에 유전해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본조의 모든 선비가 근본을 추구하고 의의를 풀이하여, 그 도학 연원(道學淵源)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에 대해, 낙민(洛閩)에 소급하고 은주(殷周)에 젖어드는 이가 다 선생을 조종으로 삼았으니, 그 치도(治道)를 제재하고 나라를 보존하고 충(忠)을 다하고 인(仁)을 이룬 것은 사실 선생의 여사(餘事)이다. 본조 초기부터 점차 선생을 포상(褒尙)하여 오다가 중종조(中宗朝)에 와서는 정암(靜菴) 등 제현(諸賢)이 배출되어 선생의 도학을 더욱 천명하는가 하면, 드디어 문묘(文廟)에까지 배향시켰으니 그 보답에 대한 전례가 지극하다. 그러나 만약 선생을 설총(薛聰)ㆍ최치원(崔致遠)ㆍ안유(安裕) 등 제현(諸賢)과 동과(同科)로 친다면, 상론(尙論 고인(古人)의 언행ㆍ인격 등을 논하는 것)하는 이들이 혹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신우(辛禑)ㆍ신창(辛昌) 때 사관(史官)의 기사가 많이 빠졌기 때문에 선생의 나아가고 물러선 의(義)에 대해 후세에 혹 의심하는 이가 있지만 선생은 의(義)가 정밀하고 인(仁)이 성숙하여 정당한 도(道)로써 주선(周旋)하였으니, 군자의 처사를 어찌 뭇사람이 알 바이겠는가. 옛날에 어떤 사람이 선생에 대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마땅히 허물이 있는 중에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참으로 지론이다.아, 선생은 위급한 나라에 마음을 다하다가 마침내 몸으로써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충(忠)이 훌륭하고, 상제(喪祭)의 예(禮)를 실천하여 옛 풍습을 고쳤으니 그 효(孝)가 크다. 그러나 예로부터 충ㆍ효에 독실한 이가 대대로 끊이지 않았으니, 선생의 충ㆍ효는 오히려 그 상대가 있는 셈이요, 호원(胡元)을 배척하고 황명(皇明)에 귀의, 중화의 제도로써 호속(胡俗)을 개혁시켜 우리나라를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어 어엿한 예의의 나라를 이룩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의 큰 공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춘추(春秋)》를 상고해 보면, 현(弦)ㆍ황(黃) 두 나라가 멀리 형초(荊楚) 밖에 위치하여 중국만을 사모하고 초(楚)에 의부하지 않다가 끝내 초에게 멸망하였으나 후회하지 않은 예가 있었으니, 선생의 공로 또한 혼자만 훌륭할 수는 없는 셈이다. 오직 유자(儒者)의 학(學)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그 학을 하는 데 반드시 주자를 조종으로 하여, 후세의 배우는 이로 하여금 모두 경(敬)을 주장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지식을 배양하고 자신에 돌이켜 실제를 실천할 줄 알도록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성학의 요체이다. 그 공로를 어느 누가 맞설 수 있겠는가.또 주자 이후로 중국의 도학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ㆍ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의 무리가 황당ㆍ괴벽한 설(說)을 내세워 온 천하를 전도시킴으로써 수사(洙泗 공자(孔子)의 연원(淵源))ㆍ낙민(洛閩)의 종맥(宗脈)이 어두워져 전해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해독은 옛날 홍수(洪水)와 맹수(猛獸)보다 더 심하였다. 우리나라만은 그 선택이 정밀하고 수지(守持)가 전일하여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분열되는 의혹이 없었으니, 이는 아무리 선생 이후 현자(賢者)들의 공로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을 추심한다면 선생을 제외하고 또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전후 상론(尙論)하는 선비가 누구나 선생을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조종으로 추존하고 있으니, 이는 사림(士林)의 공론이다. 옛날에 문중자(文中子 수(隋) 나라 왕통(王通)의 사시(私諡))가 말하기를,
“부자(夫子 공자)를 통하여 망극한 은혜를 받았다.”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선비들도 마땅히 선생에게 이와 같이 고마워해야 한다. 아, 이는 사실 하늘이 우리나라를 위하여 이 같은 철인(哲人)을 내어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을 계발, 끊긴 것이 이어지고 어두운 것이 밝아지게 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좌우될 바이겠는가.선생은 연일인(延日人)이다. 시조 습명(襲明)은 고려 때 명유(名儒)로서 벼슬이 추밀원 지주사(樞密院知奏事)였고, 증조 인수(仁壽)와 조부 유(裕)와 아버지 운관(云瓘)은 다 높은 관작(官爵)에 추증되었고, 어머니 이씨(李氏)는 서승(署丞) 약(約)의 딸이다.선생의 두 아들은 종성(宗誠)ㆍ종본(宗本)이고, 광묘(光廟 조선 세조(世祖)) 때에는 이름을 보(保)라 하는 이가 육신(六臣)과 친하였는데,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평소에 늘 강개해하던 그는 한명회(韓明澮)의 첩(妾)으로 있는 서매(庶妹)를 찾아가서 묻기를,
“공(公 한명회를 이름)은 어디에 갔느냐?”
하니, 그 서매가, 옥사(獄事)를 처리하러 입궐했다고 하므로 그는,
“공은 반드시 만세(萬世)의 죄인이 되고야 말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한명회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입궐하여 상께 아뢰고, 그를 친국(親鞫)하도록 하였다. 그는 평소에 늘 성삼문ㆍ박팽년(朴彭年) 등을 정인군자(正人君子)로 여겨 왔으므로 진정 이 같은 말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상이 그를 환열(轘裂)시키도록 하므로 좌우에서 아뢰기를,
“그는 정모(鄭某)의 손자입니다.”
하자, 상이 갑자기 감사(減死)를 명하면서,
“충신(忠臣)의 후예이다. 다만 영일(迎日)로 귀양 보내라.”
하였으니, 그 기절(氣節)을 존숭해 주었다 하겠다.그 뒤에 세대가 더욱 멀수록 후예가 더욱 부진하므로 아는 이들이 의아해하다가 근세 이래로 점차 번창해졌다. 그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이로는, 우의정 유성(維城)과 판중추(判中樞) 응성(應聖)과 인평위(寅平尉) 제현(齊賢)과 통제사(統制使) 부현(傅賢)과 동지(同知) 척(倜)이고,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이는 으레 음직(蔭職)으로 채용되어 왔는데 지금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 찬광(纘光)은 선생의 11대손이다. 고인(古人)의 말에,
“1천 명의 안목(眼目)을 틔워 준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번창한다.”
하였으니, 여기서도 선생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천지가 융화되어 / 堪輿磅礴한 이치 충만한데 / 一理充塞풍기가 돌고 돌아 / 風氣周旋선후로 개척되므로 / 開有後先옛날에 온 민중(閩中)이 / 昔者全閩만이의 풍속이었다가 / 一蠻夷區주자가 나면서부터 / 洎紫陽生공맹의 풍속 되었네 / 爲魯爲鄒우리 동방도 / 惟此東方본시 구이의 하나로 / 寔惟九夷기자(箕子) 이후로는 / 父師之後팔교가 점차 침체되어 / 八敎漸微고려의 풍속 또한 / 勝國謠俗퇴계를 숭상하였는데 / 猶是椎髻우리 선생이 / 惟我先生그 말엽에 우뚝 나서 / 崛起其季호걸스런 재주와 / 豪傑之才순수한 기품으로 / 純粹之體스승의 전수 없이 / 不由師承자연 도와 부합되어 / 默與道契일신에 수양하니 / 修之於己그 행의 향리에 충만하고 / 行滿鄕里나라에 활용하니 / 行之於國그 풍교 원근에 미쳤으며 / 風動遐邇학궁(學宮)이 설치되고 / 庠序旣設의례(儀禮)가 완비되니 / 俎豆莘莘선비는 시서를 외고 / 士誦詩書백성은 날로 진작되었네 / 民趨作新당시에 온 천하가 / 當時天下호원에게 망했는데 / 陸沈胡虜다만 고려가 중화의 도 지켰으니 / 維茲用夏주의 예가 노에만 보존된 셈일세 / 周禮在魯명을 높이고 원을 배격하여 / 義主攘夷어둔 데를 버리고 밝은 데로 향하니 / 背陰向明춘추의 대의가 / 春秋大義해와 별처럼 밝았다가 / 炳如日星그 포부 다하지 못한 채 / 未盡底蘊천주가 갑자기 무너지고 / 天柱忽傾몸은 이미 가셨으나 / 其身旣沒그 도 더욱 영원하여 / 其道益壽마치 태산과 같고 / 若山有岱또 북두와 같았네 / 如北有斗대저 선생의 도는 / 蓋先生道곧 주자의 연원으로 / 乃紫陽學그 헌장 이어 서술하여 / 祖述憲章실천에 옮기고 마음에 체득하였으며 / 躬行心得사석(師席)에 있어서는 / 其在丈席백가의 설 제쳐 놓고 / 攘斥百家횡설수설하여 / 橫說竪說다른 변동 없으므로 / 一此無他선생의 그런 논설 / 第所論說듣는 이 의아하다가 / 聽者疑惑호씨의 사서통 보고 나니 / 及得胡通모두가 다 부합되었는데 / 無不符合거리와 세대 멀어 / 地遠世後마치 배가 항로 끊긴 것 같으나 / 若航斷港선생의 득의 말한다면 / 因言得意엉긴 피 지금도 남아 있네 / 痕血摑捧그 뒤 제현들의 / 爾後諸賢계승이 신장되었으니 / 承繼張皇역대를 꼽아 보면 / 歷選前後그 공로 맞설 이 없어 / 其功莫當마치 송의 주염계가 / 若宋濂翁처음 태극도설 창안하여 / 始建圖書장자 정자를 거쳐 / 以授關洛주자에게 전수하듯 하였네 / 以傳閩甌이는 전혀 하늘의 계시로 / 此殆天啓도의 근원 통할하였으니 / 統會宗元모든 우리 후학은 / 凡我後學그 근원 길이 추구하소 / 永泝其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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