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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제 치하 일본에게는 세금을 낼 필요없다며 세금을 징수하러 온 일본 관리를 엄하게 꾸짖어 돌려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1919년 2월 고종장례식 인산례 때는 일제가 금하는 백립을 쓰실 만큼 선생은 올곧은 선비의 절개를 지켰다. 하지만 우리 동포에 대한 사랑은 남달라 흉년에는 집안 곳간을 모두 열어 헐벗은 사람들을 규휼하는 인자함을 지녔다. 1919년 3월 1일 일제 치하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을 때 각계 33인중에 유림대표가 빠져 있음을 애통해하며, 이에 유림들은 어려움에 빠져있는 조국의 상황에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향후 활동 방향을 논의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3월 김창숙, 손후익, 김황 등 유림대표들은 해외에 독립기지건설과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향성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진주의 부호이자 지역 유림의 지도자였던 선생은 자기 재산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김창숙, 송영우, 김화식 등과 함께 1925년 9월 비밀결사조직인 신건동맹단을 결성하여 진주, 함양 등 서부 경남지방 자금 모급을 총괄하였다. 이를 통해 거두어진 자금은 무기구입 등 독립활동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 1926년 3월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밝혀져 선생은 손후익, 김황, 김화식 등과 함께 피검되었으며, 유림 600여명이 체포되었던 이 사건은 일제하 유림 선비들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서 병인유림단사건 또는 제2차 유림단의거라 한다. 선생은 대구감옥에 구금된 후 9개월동안 미결수로서 옥고와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 결정으로 방면된 후, 옥고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 무진년 1928년 1월 3일에 서거하니 향년 53세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선생의 항일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2002년 8월 15일 제57주년 광복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