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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태안의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여 1873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개화파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2년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수행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 문물을 직접 보고 온 것 또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고 《대한황성신문》 사장을 맡아 언론계에서 활동했고,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에 참가하고 교육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등 개화 사상에 기반한 계몽 운동에 활발히 나섰다.
1906년 손병희를 통해 천도교에 입교한 뒤,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으로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 사장을 맡고 있던 이종일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거사 열흘 전부터 비밀리에 인쇄한 것이다. 당시 보성사는 최신식 인쇄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종일은 이곳에서 천도교의 월보를 펴내고 있었다.
이종일은 거사의 핵심중 하나인 독립선언서 인쇄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데다 최남선과 함께 이승훈을 통한 기독교 대표들과의 연결 고리를 주선하였다. 이에 따라 공판에서 민족대표 중에서도 주범으로 꼽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조선국문연구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글맞춤법을 연구한 한글학자이기도 했다. 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