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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人乃天)과 사민평등(四民平等)의 종지 아래 후천개벽(後天開闢)의 혁명정신으로 무장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이 호남의 만석보 기슭에서 수천의 농민군을 편성하여 첫 봉화를 든 것은 갑오(1984년) 정월10일, 20일께는 다시 대거하여 백산(白山)을 점거하고 습격해 오는 관군들을 격파하면서 승승장구, 4월말에는 전주성까지 함락하게 되니, 혁명의 성공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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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청일양국의 무력간섭 아래, 이 나라의 주권마저 위협받게 되자, 정부 측이 먼저 화해하기를 청하니, 우국애민의 일념에서 동학군은 마침내 양보하여 전주성을 내어주고,
그 여력을 오직 지방조직에만 기울였다.
그런데 불구하고, 군국주의 일제의 엄청난 야욕은 돌연 남의 나라 주권을 침해하면서,
경쟁상대인 청국군을 패주시키고 한반도 전역을 독점하고자 날뛰게 되니, 정녕 국가의 명맥이 통틀어 풍전등화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동안 후퇴했던 동학군은 드디어 항일구국의 독립군으로 재무장하고 총궐기하였다.
남북접(南北接)이 호응 합세하여 20만의 대 병력을 논산평야에 집결시키고,
전봉준과 손병희 두 통령의 작전지휘 아래 서울까지 진격하는 주요 거점으로 공주성부터 공략하게 되었다.
그 결과 10월 하순부터 전개된 공주성의 대 공방전은 이 우금치(牛金峙)를 중심으로 날이 갈수록 처참하고 가열하게 되었다.
한 고지의 주인을 4~50 차례나 바꾸어 가면서 세계전사에 유례없는 격전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하다가 새로 투입된 일본군의 증원부대가 근대의 무서운 살인무기 기관총으로 연속 맹사격을 퍼붓게 되니
악전고투하기 3일 만에 동학군은 막대한 희생자를 내인 채 전우들의 시산혈하(屍山血河)를 넘고 넘어 11월11일 논산방면으로 철수하였다.
대망의 혁명과업이 여기서 좌절당하고 계속되는 추격과 살육 속에 그들의 위국단침(爲國丹忱)조차 알아줄 이 없었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광복 4.19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1973년 11월11일 글 이선근 문학박사 동학혁명군위령탑 건립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