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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 김규식(金奎植)은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1919년 2월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침략의 악랄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동년 8월 6일에는 외신기자 클럽에서 80여명의 각국 유력인사가 초청된 가운데 한국독립의 타당성과 일제침략의 흉계를 폭로하는 등 5개월동안 동분서주하며 세계여론에 호소하다가 여운홍, 김탕과 함께 동년 8월 9일 미국으로 갔다. 1919년 8월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독립문제가 미국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임시정부 학무총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1월 상해로 돌아와 임정에 합류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한국의 대표 52명중 1인으로 참석하여 몽양과 함께 의장단에 선발되어 활동하였으나, 기독교 신자인 우사가 공산당식 유물론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1923년 1월 3일에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는 임정을 불신한 결과 창조와 개조의 양분된 논란으로 일관하다가 결렬되었다. 가장 좋은 공론(公論)의 수렴을 목적으로 내걸었으나 갑론을박, 의견개진으로만 시간을 낭비하였다. 더욱 공산계의 인적 재정적 침투로 인해 소기의 목적도 거두지 못한채 침체국면에 빠진 임정을 우사(尤史)와 원세훈(元世勳)이 재정비 강화하는데 비중을 두었다. 이때 우사(尤史)는 원세훈(元世勳) 등과 같이 북경·천진 등을 왕래하며 회의소집에 정열을 바친바 있었다. 우사(尤史)는 창조파에 의해 국민위원회의 위원직과 내무위원장직에 추대되어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갔고 1925년에는 니콜리스크까지 가서 문창범,윤해,신숙 등과 어울려 담론도 폈었으나 다시 상해(上海)로 추방당해 왔다. 소련은 이처럼 약소민족의 지도자를 거창한 이론처럼 지원하는게 아니고 추방해버리는 혹독한 정책을 함부로 펴곤 하였다. 시베리아에 체류하고 있던 독립운동가가 소련과 공산주의자를 못마땅하게 대했던 것은 이같은 이유에서였다. 우사(尤史)는 임정요인과 더불어 광복투쟁의 의욕을 잃고 교육계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상해(上海) 복단대학(復旦大學) 등에서 영문학을 교육했던 것은 정치활동이나 광복투쟁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의하던 그 대학이 프랑스 조계내(租界內)에 있지 않았었으므로 일본영사관에 의해 항상 체포의 위험이 뒤따랐다. 그는 체포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김중문(金仲文),여일민(余一民),왕개석(王介石) 등 가명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에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 그는 교수생활도 해 나갈 수 없었다. 그는 1927년 천진(天津)으로 옮겨가 1929년까지 북양대학(北洋大學)에서 교수생활로 자녀와 생계를 꾸려나갔고 1927년 2월에는 유자명(柳子明) 등과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 그 회장으로 추대되어 급진파와 기맥을 통하면서 독립투쟁을 지속화 시켰다. 이 연합회는 기관지로 『동방민족(東方民族)』을 간행(中,英,韓國語)하여 각국에 발송하고 비밀지부도 설치 운영하였다.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가 동삼성일대를 점령하고 다음해 3월 괴뢰 「만주국(滿洲國)」을 수립, 침략의 정당성을 내외에 알렸다. 국제연맹에서도 일제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리튼(lytton)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관심이 동삼성으로 집중되었다. 이 어간에 김구에 의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투탄의거(1932. 4. 29)가 일어나 임정은 현재 마당로 306-4 청사(1926-32)를 떠나 항주(杭州)로 갔고 요인들은 가흥,소주,무석,진강,남경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피신하였다. 이때 중국측에서는 국민정부와 민간인이 연합하여 민간 외교사절을 구미에 파견하기로 하고 수석전권에 북양대 교수 김규식을 선임 파견하였다. 그는 20여명의 외교전문가를 대동하고 수백만원의 군자금까지 보조받아 활기를 띠었다.(동아일보 1932. 11. 5) 우사(尤史)는 통일전선을 구축해야 「힘」도 발휘할 수 있고 공신력도 있다는 여망에 따라 한독당(김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의열단, 한국혁명당, 광복동지회의 대표를 모이게 하여 1932년 10월 25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그는 1933년 4월 5일 나성(羅城)에서 500여명이 모인 구류노류대학에서 한국독립에 관한 연설을 해서 청중을 매료시켰다. 그것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미국인을 탄복케 하였다. 이 동맹을 주축으로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결성하고 그 다음해인 1933년 그 대표자격으로 북미 각지에 가서 독립운동자금 약 8천불을 모집해 왔다. 그는 통일동맹을 결성하던 1932년 11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의 송병조, 양기탁 등의 요청으로 국무위원이 되었다. 4·29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침체·고착상태에 있던 임정은 보다 활기를 띠었고, 내외의 작전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도산 안창호와 춘산 이유필이 상해에서 윤의사의거와 관련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당해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 이 무렵이었다. 상해에 왔다가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의 김원봉, 의열단원인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유자명 등과 친분을 두터이 하여 무장항일투쟁에 동조 호응하였다. 김원봉이 「4·29」직후 남경으로 가서 남경 중앙군관학교내에 한국지대를 설치, 무관을 양성하였는데 그도 20여명의 교관중 한 사람으로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통일전선을 성립시켜 한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해온 그는 1935년 6월 20일부터 7월 3일까지 한국독립당(신당참여 찬성파 : 조소앙, 박창세), 조선혁명당, 신한독립당(이청천계), 조선의열단(김원봉, 윤세주), 대한독립당(하와이), 미주대한국민회, 뉴욕 대한인교민단, 하와이 대한국민회, 하와이혁명동지회의 9개단체 대표 32명으로 하여금 남경에 모여 혁명단체대회를 열게하였다. 여기서 단일당의 숙원이 달성된 셈인데 이것이 조선민족혁명당이었다. 1935년 7월 5일에 이 당이 조직완료됨으로써 한국 대일전선통일동맹은 동시에 해체되었다. 그 당의 실력자인 김원봉은 동당의 총서기였으나 주석으로 우사(尤史)를 추대하였다. 그는 귀국한 직후인 1946년 2월 18일 동당 주석의 직책을 사퇴하였다.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분명한 17개조의 강령의 대부분은 우사의 사상이나 경륜이 담겨 있으리라 믿는다. 우사는 약산을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치 않고 다소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로 규정한 것 같다. 약산이 공산주의자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모르고 환상속에 끌려다닌 사람이라고 보았다. 조선민족혁명당은 통일정당으로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1936년에 조소앙이 이탈했고 최동오·홍 진·이청천이 차례로 탈퇴하였다. 1938년에도 최창익이 결별선언을 하고 물러나는 등으로 인해 통일성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였다. 남경의 중앙정치학원에서 교편을 잡던 우사는 7·7(1937) 중일전쟁이 발발되기 전인 1935년 사천성 성도(四川省 成都)로 가서 실천대학의 교수로 안전한 생활을 누렸다. 임정에 몸담고 있으면서 위험성이 가중될 때 우사는 용케도 이 위기를 모면하곤 하였다. 그것이 청장년층의 임정고수파로 부터는 비협조자로 지적된 사항이기도 하였다. 20여년의 교수생활이 임정 당시 광복운동시기에 있었다는 것도 백범·우남·몽양 등과 그 투쟁방법상의 차이를 던져준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권유로 백범과 약산이 공동전선을 폈는데 그때가 1939년 5월이었다. 그것은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민혁당이 임정에 참가함으로써 좌우가 합작된 것으로 보인다. 1942년에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合編)되었으며 민혁당계열이 의정원 의원으로 정식 참석하였다. 우사(尤史)는 1942년 10월 장건상과 같이 임정국무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보선되었으며 1944년 2월에는 주석·부주석 지도체제로의 5차개헌에 따라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비록 그가 부주석에 선임되었다고 했으나 ‘투표권도 없는 투명치 않은 자리’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선전·외교·군사문제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며 각 당파의 합작적 요식행위에 따라 김원봉이 군무부장에 선임된 케이스와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한독당대 민혁당의 대립을 완화하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일원화(一元化) 권유도 받아들여야 했기에 우사(尤史)가 그 인품이나 경륜·비중·능력 등으로 보아 가장 적임자라해서 선임된 것이다. 이런 좌우익파의 갈등은 1943년 민혁당측이 한독당의 김 구(金九) 등 국무위원 5명을 암살제거하고 민혁당의 김원봉 등이 대신 입각(入閣)하겠다는 미수로 끝난 모의문서 속에서 그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45년 11월 23일 백범등과 귀국할때까지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우사(尤史)는 1942년 10월 11일 400명 규모의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손 과(孫科)·김구·김원봉 등과 중경에서 조직, 문화와 혁명사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어 1944년 6월 1일에는 중국측의 오철성(吳鐵城) 등과 한국측의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을 설득 기독교 한교복리회(基督敎韓僑福利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한교의 생활증진과 독립운동의 진행을 촉진함에 기여하였다. 두단체는 우사(尤史)의 독립의지에 탄복한 나머지 광복운동의 지원(支援)을 위해 중국측에서 서둘러 조직한 것이다. 임정은 1945년 3월에 우사와 조소앙(외무부장)·정환범(鄭桓範)·임의택(林義澤) 등을 미국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코자 국민당정부의 지지와 군자금까지 결재되었으나 미국의 거부로 참석치 못하였다. 광복후 그가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주도한 것은 30여년을 통일과 대동단결을 주장한 맥락 때문에서였다.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어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