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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 가평의 얼과 인맥 고기(古器)와 세첩(世傑)을 다 소실(健失)딩-하였으며 가족을 인솔하고 해도중(海,흙ψ)에 피 난하였더니 그 다음해 공이 13세 때 (1637년 4월)에 그 섬이 힘-락되고 공과 가족이 다 붙잡 혔는데 적이 공이 연소(年少)하면서도 씩씩함을 기특히 여겨 진중에 두고 감언이설로 항복 하라고 권하되 끝내 듣지 않으시니, 그 해 9월 부인과 함께 심양관으로 보내어 억류되셨다. 자. 대동 유상생(大同 柳l훌生) 휘(證)는 계산(漢山) 자(字)는 허미(許美)이니 1627년 3월 18일 대동에서 났고 그 부인은 남씨(南民)이니 1622년 3월 9일에 났다. 공은 천성이 담박(淡뻐)절속(總%-)하여 천부산(千 夫山)중에서 가동(家僅) 수인을 데리고 은거하더니 공이 18세 때 (1644년)에 서울(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천지-(天子)가 순사(狗祝)하셨는데 관대(冠帶)를 할 수 없다』 고 처자와 의관을 버리고 거짓광인이 되어 하간(하간(河間)에 전전하다가 청노(淸廣)를 만 나 갖은 욕설과 호령을 하니 청병 이 의심하고 심양관으로 보내어 억류되셨다. 3. 9의사 섬양관 중 생활 및 동도(東避) 1637년(숭정10, 인조15,) 2월 인질로 심양질소에 가계신 조선의 왕자 중 특히 봉림대군(鳳 林大君): 후의 효종)은 틈틈이 명나라의 포로로 같은 심양관 중에 있는 구의사 등과 서로 접촉하여오시던 중 1없4(숭정17, 인조22) 3월 19일 명나라 서울(북경)이 이자성(李自成)에게 함락되고 의종(數L宗) 열황제(烈皇帝) 및 황후(皇텀)주씨(周民)가 만세산(萬歲山) 수황정(壽皇 亨)에서 순사(狗祝)히-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 9 의사(義土) 등은 고국이 멸망하여 재기의 희망이 영절(永總)됨을 탄식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기절까지 하여, 자결코자 하였는데, 봉림 대군께서 『통분한 마음을 참기 어려울 줄 아나 내가 장차 고국에 돌아가면 어떠한 방법으 로든지 이 만고에 없는 병자의 지욕을 갚을 결심이니 우리가 귀중한 신명(身命)을 헛되이 없애는 것보다 같이 조선으로 가서 합심 협력하여 이 원수를 갚고 명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죽는 것 이 명조의 후예남아로서 국가나 선조에게 더욱 떳떳하지 않겠는가』 하고 위로와 격 려의 말씀을 하셔서 이에 감복되어 지결할 뜻을 굽히고 여가만 있으면 서로 만나시어 호국 멸망시킬 계책만을 논의 하였다. 그러다가 l없5년(인조23) 2월 소현세자(1핍顯|止子)가 동환하 시는 기회에 9의사 등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간콕한 소청으로 억류생활에서 풀려 같이 조 선 땅으로 등도(풍상생 부인 이씨, 제남왕상생 부인 황씨는 인선왕비 <효종비>가 되실 장씨 를 따라) 고국산천을 영영 뒤로하고 압록강을 건너 낯선 땅 조선으로 건너왔다 (당시 봉림 대군은 북경<청 이 새로 천도한 곳>에 가 계시다가 동년 5월 14일 서울에 도착하셨으며)(정 진사는 압록강을 건너다가 영변에 머물러 숭정 말년에 동도하여 선천(宣) 11)지방에 유(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