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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훈제 (당시78세)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 1921년 12월 31일 평북 선천 부황 출생 1940년대 일제시기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50년대 말 ‘진보당’사건으로 위축된 운동진영을 복원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4.19시기에 학생운동의 대부로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직간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 1960년~1961년 교원노조 결성, 국학대 강사 1962년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자유언론수호협의회’결성 1969년 삼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운영위원 1970년~1979년 ‘씨 의 소리’편집위원 1973년~1974년 구화고등학교 교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운영위원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 투옥 1977년 민주주의국민연합 운영위원 1980년 ‘민주화의 봄’시기 전국적 전계층적 열망을 묶어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내란음모죄로 수배, 2년여 도피생활 1982년 포고령 위반, 내란음모 사건 관련 투옥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부의장 1985년 민통련 부의장 1986년 민통련 의장대행 1987년 6월항쟁 시기 민통련의장 대행으로 6.10 항쟁을 선언한 성공회 농성을 주도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됨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고문 1989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1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고문 1995년 고 장준하 선생 20주기 추모행사 준비위원 1999년 3월 14일 운명 |254| 민족민주열사∙희생자자료집증보판 신자유주의시기 사회 동지의 삶과 죽음 “저항은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다”선생의 삶은 그의 말처럼 `저항’으로 일 관했다. 선생은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 민족 통일을 앞당기 기 위한 운동에 한 평생을 보냈다. 동지는 ’21년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에서 농사꾼의 5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 났다. 어린 시절 압록강을 넘나들던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 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을 세우고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 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 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 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 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동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 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편집장, 민통련 부의장 등을 지내며 반독 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 란음모사건’에 연루돼 1년3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 등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혁명적 변 화와 민주화를 위해 젊은 시절부터 평생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재야의 상징으로 해방의 등불로서 역할을 하던 동지는 지난 ’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산 소호흡기에 의지하면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병상에서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일생동안 단 한차례도 구두를 신지 않았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으며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 차림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그의 옷차림이 말해주듯 동지는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 끝내살리라 |255| . ㅇ 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