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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 가평의 일과 인맥 다. 그러 던 중 지 현 서공기 (徐公템)가 납서 (1亂훨)로서 공의 구원을 청하니 공은 또 의병A 인솔하고 가서 싸우다가 몇 십 배나 되는 많은 군인과 상대가 아나 되 어 결국 패하여 지 현 서공기와 같이 적에게 포로(補廣)로 잡히니 청장(淸將) 다첩 이 목(多|뻐爾l崔)이 각가지 방 법으로 위협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항복하라고 하였으나, 『머리가 끊기더라도 무릎은 꿇 지 않겠으니 빨리 죽여 달라』 고 항거함에 마침내 그 대의에 감동하여 죽이지 않고 심 양 으로 보내어 그 해 4월 심 양관에 집류(폐留)되셨다 ... 중략 ... 다. 항주 황유수(抗州 黃留守) 휘 (歸)는 처 음에 는 전공(끓功) , 동도(東道) 직 후에 는 전(줍) , 또 그 후에 는 공(功) , 자(字) 는 성보(聖報)이니 1612년 10월 2일 항주에서 났다. 그 부친은 지휘사(指揮따) 휘(譯) 빈 (좁)이고 그 조부 선무사(효빡使) 휘(띔) 갑(甲)이다, ---중략 ... 공이 19세 때(1630년) 진사(進土)에 급제하시어 역관(땀官) 수광, 전딩-지현(끓光, 錢塊知 縣) 기산(析니J) 지휘자(指揮者) 중도(中컵I~)유수(留守)에 이르렀는데 이 때에 사방에서 도적 이 심하여 짐 에 공이 33세 때에 (1없4년) 현중(縣中)사민(士民)을 소집하여 병마를 조련하고 서주 (徐州)에 진주하였다가 서울(북경)이 힘-락한 소식을 듣고, 통독하여 병이 되었다가 사상서 (史尙뿔::)가 남경 에서 복왕(福王)을 세우려함을 알고 흩어진 병졸 3천여 명을 다시 모아 사 싱서를 돕고자 회양(推陽)까지 가다가 청병(淸兵)이 이 미 비 (좌)땅에 이르러 연락을 못하게 됨에 할 수 없이 그 곳에서 싸우시다가 결국 패하여 적 에 게 잡히어 심양관에 갇히었다. 라. 낭야 정진사(鄭椰 鄭進士) 낭야 정진사(떠l‘쩨 鄭進:1:)의 證는 선겁-(先甲) 字는 시인(始仁) (흑 삼신<三新> ))이 니 1617년 5월 18일 낭야(펴|‘fI.Jjí)에서 났다. 그 부친은 무석(無錫) 지현(쩌l縣) 흠차(줬差) 하남 (河南)순안(파按) 승(~포) 이 과(更科)급사중(給事中) 휘(합) 응벙 (}J탠다뽕)이고 그 모친은 연주 (흉州) 주씨(朱民)이 다 ... 중략 .. 공이 26세때 (1642년)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병환으로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있 다가 28세 (1없4년) 서울에 난이 일어남을 듣고 서울에 올라가니 이미 함릭-되었는지라 흰옷 으로 발상하고 밤낮 통곡하다가 적 에 게 붙들려 심양관에 갇히게 되었다 마. 통주 양상생(通州 楊1훌生) 휘(템)는 복길(福팎) 지-(字)는 상보(詳범)이니 1617년 6월 2일 通j'l‘|에서 났고, 그 선조는 서촉(西團) 사람이며 그 부인은 청송(뿜松) 심 씨 (沈民)이니 1629년 3월 7일 났다. 공은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