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page
127page
1919년 3월 20일의 군북면 군북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던 조상규·조용효·이재형·조정래·조성규·조경식·조형규 등에 의하여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 놓고 인근지역 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은 오전 9시 군북면 동촌리의 신창학교에서 50여명의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이를 신호로 군북장터에 있던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제히 궐기하였다. 오후 1시경, 3천여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군북경찰주재소의 경찰과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출동하여 공포를 발사하여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오후 5시경, 5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다시 궐기하여 경찰주재소로 달려갔다. 사태의 급박함을 느낀 일본 경찰이 공포를 발사하자 격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주재소의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잔인하게도 시위대열에 조준사격을 감행하여 2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8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결국 그도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1919년 8월 21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