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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북한군의 정예부대였던 6사단은 2개 부대로 나눠 15연대를 익산~김제~목포 방향으로, 1연대를 익산~전주구례~순천방향으로 진격시켰다. 전주와 고창을 점령한 그들은 1950년 7월 22일 장성을 점령했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국군 5사단 예하 15연대와 26연대가 재편성하고 있었다. 국군의 무장 수준은 경찰로부터 입수한 99식 소총 10정과 광주병원(3육군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가 휴대했던 M1 소총 몇 정이 전부였으며, 각 부대는 10% 정도만이 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경찰병력 규모는 500명 정도였으나 무장은 M1과 99식 소총뿐이었다. 그나마도 3명 중 1명만이 소총을 휴대한 실정이었다. 북한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1950년 7월 23일 광주 북구 동림동에 위치한 옛 산동교에서 북한군과 최초의 교전이 발생했다. 교전 당일 장성에서 퇴각한 26연대는 7월 23일 새벽 4시에 북한군 전차 방어를 위해 산동교를 폭파했다. 26연대 병력과 김홍희 총경이 지휘하는 장성경찰서 대원들로 편성된 군경 혼성부대는 산동교 부근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한 후 적 공격에 대비했다. 7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6사단 15연대 병력 일부가 전차 2대를 앞세워 산동교에 이르렀다. 군경 혼성부대는 2.36인치 로켓포 등을 발사하며 1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전투로 인해 북한군의 마산지역 이동은 상당한 시간 동안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산동교는 광주지역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유일한 전적지로, 2011년 11월 10일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이처럼 역사의 아픔과 함께 영산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옛 산동교는 친수(親水) 공원의 일부가 돼 새롭게 건설된 신 산동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시민들의 건강과 문화의 공간, 6·25 체험행사, 현충시설 탐방 등 나라 사랑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