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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1890년 경술년 21세 약관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손오병서를 외우는데 열의를 가졌다. 비운의 1905년 일제 을사조약에 이르러 이것을 물리칠 계책을 조정에 상소하였으나 반송되고 올라가지 않아서 의분을 품고 퇴궐하였다. 그후 국내정세는 고종의 양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국민들의 가슴 아픈 일이 많이 벌어졌다. 평산지방에서는 박정빈 이진룡 등 애국인사 10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끝내 경술합방으로 국내 투쟁의 한계를 느끼게 하였다. 여기서 의사 원석 조맹선은 정든 고국 산하를 떠나서 압록강을 건너갔다. 그리고 이진용 박장호 등과 장백 무송 집안 임강현 등지로 옮겨다니며 군사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의 징모와 훈련에 힘을 기울이었다. 신해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환국했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다행히 석방되었다. 이후 상복을 입은 채 유하현으로 들어가 김정섭과 군인을 모아 독립단으로 하고 교련에 열중하였다. 1919년에는 여러 애국단체를 통합한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이 조직되었는데 여기 단장으로 추대되어 실제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더욱 병력을 증강하는 한편 국내외로 조직망을 확대하여 그해 12월까지 지단 지부가 100여개소에 이르렀다. 또한 간부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직강화와 군자금 모금과 전투활동의 전개를 실시하였다. 더욱이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관으로 만주의 군사활동을 통솔지도하는 중책을 맞기도 하였다. 이는 그의 신망과 지도력이 독립군 지도자들간에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1920년 겨울에 취봉령 진중에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던 중 병을 얻어 음력 10월 24일 51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부인 하양허씨와의 사이에 아들 태부가 있으며 손자는 희동 양동 흥동 삼형제가 있다. 해방 후 고향인 평산군 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