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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오적 처단을 부르짖는 분노의 함성이 온 강토에 메아리치고 항일의병이 사기하자 선생은 조국을 수호키 위하여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노라 하시고 약관 21세의혈기청년으로 당시 홍주에서 봉기한 민종식 선생이 이끄는 항일의병이 전담하여 홍주성을 점유하는 대격전을 벌였으나 신무기로 무장된 일군의 강한 포화의 반격으로 9백 의병에 전몰하는 참패의 한을 남기고 이어 홍주성의 분패를 설욕키 위하여 1907년 5월 5일북간도로 망명 항일투쟁을 계속하다 불행히도 일경에게 피체되어 1개월 여의 혹심한 고문과 옥고 끝에 석방은 되였으나 강제귀가 조처를 당하여 장부의 의기를 힘껏 펴보지 못한 체 망국의 한을 억누루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1910년 드디어 경술국치로 온 민족의 비분이 철천에 이르던 11월 20일 일제식민씨의 제일진으로 침입하여 우리 민족의 경제적 고혈을 착취하기에 온갖 만행을 자행하던 흡혈귀 강구를 일격에 제거하니 이는 항일 복수감정이 충천하던 당시의 일대 쾌거이였다. 그 혐의로 선생의 부친 소상 파제일인 1911년 12월 4일 미명에 홍산헌병대에 체포되어 공주감옥에서 31개월의 혹심한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선생의 항일 원한은 더욱 깊이 남은 체 일제의 요시찰의 수모와 가혹한 압제를 견디면서 조국광복의 그날을 기다리며 인생 60을 보냈으니 선생의 사생취의의 거룩한 정신은 길이 후세 귀감으로 족할 것이다. 선생은 광복 후 건국에 남은 정성을 다하였으며 유도 창달에도 공이 컸으며 창렬 청일 양사의 임원을 역임하시었고 또한 선생은 부모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부복통곡하시며 왈 사람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함이 도리이거늘 나라를 수호하지 못한 불충과 부모에게 효를 하지 못한 것이 여한이라며 눈물을 멈추지 못하시었다. 신축년 12월 15일에 서거하시니 수가 76이시다. 선생의 의거가 70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