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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생애를 믿음과 의로움으로 살다간 분이 잠드셨으니 이가 곧 목사요 지사이신 신재 김 휘 원휘 공이시다. 공은 의성인으로서 1884년 7월 20일 의성군 휘 석공의 33세손으로 나시어 1949년 5월 24일 대구에서 선종하셨다. 공은 천성이 온화 영명하여 일찌기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고루한 인습의 굴레를 벗고 빛과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에 입교하셨다. 이 무렵 조국은 간악한 일제의 침략 흉계로 마침내 국권이 상실되는 비운을 맞아 나라와 겨레는 온통 암흑과 ㅇ루분 속에서 통한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공은 은인자중 겸허한 신도로서 오로지 박애와 봉사에 뜻을 두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중 드디어 3.1 만세운동이 태동하자 평소 길선주 목사에게 감발된 바 있어 공은 분연히 일어나 경북지역의 연락 및 지도의 책임을 맡는 한편 당시 공의 시무지구였던 의성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 이로인해 공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월의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니 옥중에서도 공은 재소자들에게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함으로써 불굴의 지기와 신념을 거침없이 발현하셨다. 이러한 와중에서 받은 고문과 고통으로 공은 청력을 잃었으며 이를 회복하지 못하신 채 세상을 떠나셨다. 출옥 후에도 늘 감시의 대상이었으며 2차 대전 중에는 더욱 미행과 예비검속이 무상하여 불안과 수난의 나날은 이어졌다. 광복 후 목회 생활로 헌신하시다가 노환으로 소천되셨으니 공의 일생은 실로 고난과 희생을 통한 빛과 사랑의 평생이셨다. 1980년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시고 1988년 이곳 선열묘역으로 옮겨지셨다. 주님 뜻이 함께하는 공의 이름 위에 빛이여! 영원할지어다. 서기 1988년 월 일 문학박사 이동희 찬 문학박사 김기탁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