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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구 선생 묘소 안내판 바로 옆에 있는 애국지사 박종식 선생 묘소 안내.
경남 함안의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봄 서울 사립 중앙학교 중등야학교(中等夜學校)에서 교육을 받았다. 박종식은 대종교(大倧敎, 檀君敎)를 신봉하여 이를 국교로 하는 제2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였다. 박종식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관을 설치하여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모으고, 국내의 청년을 고무 격려하고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켜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노예의 상태에 빠진 동포를 구제하며 자손들을 위해 일신(一新)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에 1916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친일파 부호 민영휘(閔泳徽)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편지에서 그는 민영휘에게 “거사에 찬성하고 이에 요구되는 비용의 제공을 허락할 것이요,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토멸대를 조직하고 와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정안(正眼)과 정재(正財)로써 정의의 사업에 사용하지 않고 비열한 사업을 하는 자는 징벌을 하더라도 도리에 통하고 천리(天理)에 합치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민영휘는 편지를 받고 종로경찰서장에게 제출하였고, 이로써 사건이 발각되어 1916년 7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공갈,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9일 박종식은 함안읍내에서 안갑중·안재성(安在成)·조영규·조동락, 매형 안재형(安在瑩)과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이 시위를 지도하던 안지호(安知鎬)가 구금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후 1920년경 경남 마산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책 송두환(宋斗煥)과 함께 활동하던 중, 음 12월 23일 경북경찰부 고등경찰과에 검거되어 두 달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으나 완강한 부인과 묵비로 인해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또 다시 독립운동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