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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우리 땅 • ‘한말 호남의병 어등산 전적지’ 123 주 · 나주 · 함평 · 장성 · 영광 등 다른 곳으로 쉽게 이동이 가능한 곳이 다. 또 골짜기가 많고 계곡마다 물 이 있어 의병할동을 펴기에 적당 했다. 의병 활동지인 ‘마당바위’와 김태원 의병장 등이 머문 ‘토굴’까 지 힘들여 올라가보니 바로 옆에 개울이 있어 쉽게 물을 구할 수 있 었다. 또 등산로가 바위가 많고 험 해서 오르기 힘들었다. 이런 유리 한 조건 때문에 의병들이 근거지 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었다. 마당바위 · 토굴 · 석굴 등 생생한 의병전쟁의 현장 어등산에서는 1908년 4월 25 일 김태원 의병장과 23명(일부 기 록은 13명)의 의병들이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다 순국하는 참변이 있었다. 또 1909년 1월 10일에는 조경환 의병장과 20여 명의 의병 들이 어등산 자락의 운수동에서 전투를 벌여 다수가 전사하고 김 원범이 체포되기도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양동 환이 이끄는 80여 명의 의병부대 가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의병 10 명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 었다. 특히 1908년 일본 경 무국이 편찬한 '제2특설 순사대에 관한 편책'에 따르면 4월 25일 기병 대와 합세해 4면에서 포 위해 올라간 일본 군경 은 이날 오후 1시부터 6 시간 동안 김태원 의병 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 다. 이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과 부하 김해도 등 의병 23명(혹은 13 명)이 토굴과 바위굴 등 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 았다.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구례의 우국지 사 황현(黃玹)은 김태원 을 “기발한 전략으로 1 년여 동안 수백 명의 일 본군을 무찔렀고, 부하를 엄히 다 스려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 았다”라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 았다. 실제로 힘들게 올라가 확인한 정상부 근처의 토굴은 매우 비좁 고 습기기 차서 이삼십 여명의 의 병부대원들이 거처하기에는 어울 리지 않았다. 이처럼 열악한 토굴 에서 숙식하며 일제 침략군과 맞 서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에 대한 감탄과 존경심이 절로 솟구쳤 다. 아직 정비가 잘 되어있지 않고, 등 반하기에 쉬운 편은 아니지만, 죽 음을 무릅쓰고 치열하게 항전했던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는 시간은 정말 가치있는 것이었다. 다만 광 주시 당국의 유적지 관리와 안내 및 편의시설 등의 확충이 아쉽다 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석과 안내 판 몇 개가 있을 뿐, 등반로를 찾 기도 쉽지 않았다. 광주시 당국에서 세운 김태원 의병부대 전투상황 안 내판. 오른쪽에 ‘김태원 의병부대 포위작전 지도 (1908.4.25)’가 있어 이 날의 전투상황을 이해할 수 있 다. 일본군이 작성한 지도를 보면 기병대와 보병 3개 분 대가 사방에서 의병부대를 포위 공격했음을 알 수 있다. 김태원 의병부대가 활동하다 최후를 맞이한 전투현장인  ‘김태원 토굴’과 안내 설명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