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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초을해 광복절후학 인천 이태길 근찬 전몽대연헌남여상한광산후인 김영건 근서
연호 의사는 전통있는 가문의 교훈을 이어받고 일찍이 스승의 문하에서 배워 평생에 실행한 것이 오직 의리에만 전심치지하고 나라가 무너지는 날을 당해 죽음으로써 군국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니 참으로 견위치명하고 시사여귀하고 살신성인하며 불사이군한 선비라 할만하다. 공의 휘는 주환이요 자는 인팔이며 연호가 그 호인데 합천이씨로 신라 개국공신 휘 알평이 시조이다. 신라말엽에 휘 개가 강양군으로 봉해져 자손들이 본관으로 삼았으니 강양은 곧 지금의 합천이다. 이로부터 고학과 숭덕이 대대로 이어졌고 조선조에 들어와 휘 ?지는 벼슬이 사직이었으며 여러 대로 내려와 휘 방주는 학행이 매우 높고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공의 5대조이다. 고조는 휘 인배요 증조는 휘 석태요 조는 휘 우제요 고는 휘 병수 호 월간이며 효행이 있었고 사인정안이지찬의 따님과 혼인하여 철종 갑인년 서기 1854년 11월 23일 거창부북녘 연교리 본제에서 공을 낳으니 어릴적부터 언행이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8세때 소학을 읽으면서 충효가 특이한 구절에 이르면 무릎을 치면서 여러번씩 반복하였으며 점점 장성함에 연재 송병선과 심석 송병순 두 선생을 사사하고 인의의 학설을 듣고 정성껏 지켰다. 어버이께 효도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으로서 월간공이 병환이 있으매 백방으로 간병해도 해력이 없고 다만 찬얼음을 원했는데 한여름이어서 공이 도장동 음지 깊은 굴속에 들어가 울부짖다가 얼음을 얻어 아버님게 드리니 남들이 천우신조의 일이라 칭하면서 옛날 왕이 한겨울 얼음속에서 이어를 얻은 일에 견주었다. 양친의 상을 당해서는 애훼함이 예제보다 지나쳤고 3년동안 피눈물을 흘려 상복이 썩을 지경이었다. 오호라 나라의 운수가 막히고 왜놈들이 마구 날뛰어 마침내 천지가 뒤집히는 큰 국란을 당하자 두 스승님이 순절하니 공은 재실지행의 지성으로 달려가 통곡하고 가마 9월하였으며 삭망에도 반드시 참전하였다. 종상 후에는 기제때마다 진참하고 원로 하늘의 마장에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때 왜놈들의 침탈이 더욱 심해지고 징세가 가혹해지니 공은 결사항거하여 세금을 내지 않았고 왜정의 주구가 억지로 무인을 찍게 하니 만절필동이라 대갈하고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선사의 종상때까지 참고 지내면서 사소를 엿보고 있었으나 육친마져 눈치채지 못했다. 무오년 2월 21일에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공은 변을 듣고 문도들을 이끌고 교외에 나가 망곡하였으며 그 후로는 사문불출하다가 그믐날밤에는 면사무소에 가서 자가민적을 열람하고 찢어내어 불태웠으니 이날이 국상의 성복날이었다. 이날 밤 군청으로 가서 군수를 만나려고 햇으나 충지를 이루지 못하고 신명에 침류정에 올라 북향통곡하고 시를 지어 벽에 쓰기를 나라도 임금도 없는 외로운 백성 슬프게 바라우는 가련한 마음이로다. 삼천리 강토가 비록 넓다고 하나 칠십 늙은이는 떳떳하게 다닐 수 조차 없구나 서산에서 캐는 고사리는 눈에 자주 푸르렀고 동녘바다속는 달은 마음을 비추어 밝았도다. 그지없는 통한을 어디에다 하소하랴. 지하에서 우리 임금 모실 것을 맹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