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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編 서원 · 제단 · 기념관 • 125 아. 이 항로(李펄老) : 1792(정조 16)-1868(고종 5). 조선 후기의 주자학자. 화서학파(華댐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 척사론과 의뱅 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 다. 본관은 벽진(횡珍) 초명은 광로(光老) . 자는 이술(而述) , 호는 회서(파댄) [관직생활] 아버지는 회장(悔章)이다. 3세 때 〈천자문〉 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때〉 으 읽고 〈천황지황변 天뿔地皇辦〉 을 지었으며 12세에는 신기령(辛뽑寧)에게 〈서전 룩셈〉 을 배웠다. 부친의 뜻을 받들어 과거준비에 몰두하여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협격했으 나 과거급제를 구실로 한 권력층 고관자제와의 친교를 종용받고 환멸을 느껴 다시는 과거 에 응하지 않았다. 그 후 서울의 임로(任첼)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 당시 이름 있τ 하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학문적 교류를 히-면서 경학상의 제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였다.2 5-26세에 연이어 양친을 여왼 뒤 더욱 학문에 몰두하여 4서(四뿔)에 관한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나 장구(章句)를 반복연구하면서 주자의 학문에 심취했다 그는 〈주자대 전 朱子 大全〉 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궁구하면서 점치- <송자대전 뚱子大全〉 으로 나아가 송시 열(宋時烈)이 주자 이후의 정종(正宗)을 이룬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40년(헌종 6) 학 행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徵摩l훌l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 뒤에도 조인영(댐뤘 永)을 비롯한 실력자들로부터 지방수령 등의 교섭을 받았지만 고사하고 향리에 머물며 강 학에 전념했다. 한말 위정 척사론자들로 의병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던 최익현(崔益鉉) . 김평묵 (金平默) . 유중교(柳重敎) 등이 이무럽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 (李夏鉉)의 옥사 때 김순성(金順性)의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무죄임 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짧著別提)에 제수되고, 전라도도 사(全羅道휩1)事) .지평 ·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1866년 프랑스 군함이 침입하 여 강화도를 약탈한 병인양요가 일어나 이에 대한 대책을 놓고 조정 에 의 견이 분분할 때, 노성 한 사람의 의견을 듣자는 김병학(金炳學)의 제청에 따라 동부승지로 부름을 받자 입궐 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척 화론(fF:쭈~I論)을 건의, 이를 국론으로 채택히게 했다. 며 칠 후 공조 참판으로 승진발령 되고 경연관(經錯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중지와 과중 한 세금부과의 시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 고 만동묘(萬東웹)의 재건을 상소하는 등 흥 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정면공격을 가한 것 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다 [학문과 사상] 그는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 영남의 이 진상(李뚫相)과 더불어 19세기 주리철학(포핸첸學) 의 3대가(三大家) 가운데 하나로, 공자의 춘추대의 (春秋大義)와 맹지-의 의리지사(義뀐之解) . 벽 이단(關異端) , 주지-의 노불변척(老싸辦투)괴- <통감강목 通짧網 |강〉 에 나타나 있는 존화양 이(尊華癡更)의 대의(大義)를 의리정신의 맥락으로 삼아, 주자와 송시 열을 존숭했다 우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