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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후 반탁운동과정에서 죽음을 당한 김장렬과 박명섭을 기려 세운 위령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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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45년 해방후 미소양군이 주둔하자 조국은 38선으로 분단되었고 신탁통치문제가 대두되자 반탁 찬탁의 사상적 대립으로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양분되었다. 미 군정하 본지역은 공산당 인민위원회 주동으로 군민다수가 적화사상에 물들게 되었다. 민족진영은 1946년 4월 27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국민회청년단이 조직되어 좌우익대립의 불길은 치열하게 번졌다. 동년 5월에 가산리 폭동사건 발생후 공산분자들이 민주진영을 타도하려하므로 청년단에서는 청주 음성 충주등지의 우익진영에 연락하여 응원을 요청하였더니 2백여명의 응원대가 도착하였다. 즉시 진천 청년단원 3백여명의 합세로 이월면 송림리에 출동하여 좌익계열의 폭동음모를 진압하였으니 그것이 동년 8월 29일이다. 회로에 이월면 송두리 꺼먹바위 지점에 이르자 산중에 매복 대기중인 5,6백명의 좌익분자가 농기구등으로 돌연 습격하니 여기서 일대 혈전이 벌어졌다. 비인도적인 만행을 자행하는 악당들로 하여금 동족상잔의 유혈참극은 벌어졌다. 당시 중원군 이유면 출신 김장열은 슬하에 1녀가 있고 충주출신 박명섭은 약관인데 좌익분자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흉기에 맞고 찔리어 참혹하게 순사하였다. 기외 아측 부상자도 60여명이나 되었으며 긍후 양순열사의 사체는 충주로 운구되어 호암리에 안장하였고 양열사의 투철한 반공정신을 널리 선양키위하여 서기 1948년 무자 음7월에 당시 국민회주관으로 읍내리 사구삼거리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는바 6.25당시 적들의 행패로 비석 일부가 파손되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에 양열사의 반공정신을 추모키 위하여 진천군당국 주관하 전 국민회 회원이였든 427동지회 후원으로 반공위령비를 개건립하는 바이다. 양 열사는 불의 항거하고 조국수호의 기치드높이 공산도배에게 천추의 한을 품고 애석하게 순사하였지마는 그 의분심 후세의 귀감이되리로다. 장하도다 양 열사가 조국독립을 위하여 싸운 장렬한 영혼은 구천지하 에 영면하지마는 위대한 반공민주정신은 불멸의 화신으로 만인추앙의 위적이로 찬연히빛나리로다. 양 열사의 영혼이여 고이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