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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순 선생은, 함경남도 원산(元山)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1일의 원산장날을 이용하여, 이순영(李順榮)·차광은(車廣恩)·차용운(車用運)·함하은(咸河殷)·김기헌(金基憲)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의 오화영(吳華英)·신석구(申錫九)·이승훈(李昇薰)·박희도(朴熙道)와 연락하고 있던 남촌동(南村洞)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鄭春洙)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정춘수는 자신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후 귀향하여 거사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2월 23일 서울로부터 3월 1일 거사한다는 연락을 받고, 더 자세한 상황을 알기 위하여 27일에 곽명리(郭明里)를 서울로 보내었다. 전도사인 그는 2월 28일 장로 차준승(車準繩)·배성보통학교(培成普通學校) 교사 이성춘(李成春) 등과 만나, 곽명리로부터의 소식을 기다리며 몇차례 숙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차준승을 서울로 보내어 암호로 전보를 치도록 하고, 만일 연락이 안될 것에 대비하여 스스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차광은의 집에서 2천여매를 등사하여 두었다. 그러나 이때 곽명리가 오화영으로부터 전해 받은 서울의 독립선언서 3백여매를 가지고 귀향하였고, 차준승에게서도 고무적인 전보가 왔다. 이에 그는 이날 밤 이순영·차광은·차용운·김기헌·이진구(李鎭九)·김장석(金章錫)·김계술(金啓述)·정연수(鄭延壽)·인이극(印利極)·함태영(咸泰榮) 등과 함께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에서 만나 의논한 끝에, 서울에서와 같이 3월 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밤을 세워가며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시위방법으로는 13명의 주동자들이 시내 요소요소를 담당하기로 하고, 이날 밤 자정에 이순영으로 하여금 함흥까지 연락하도록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그는 각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13명의 주동자들과 함께, 시내 요소요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촌동(場村洞) 장터로 행진하였다. 다시 이곳에서 8백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지나서 원산경찰서로 행진하였다. 이때 일본경찰·헌병·소방대가 출동하여 물감을 탄 물을 소방용 호스로 뿌리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이번에는 공포를 쏘아서 오후 6시경 강제 해산하였다. 그후 일경은 옷에 물감이 묻은 사람을 집중적으로 체포하였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이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