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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선생 묘(崔始亨 先生 墓) -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 산 138 최시형(1827~1898) 선생은 조선 말 동학(東學)의 제2대 교주로서 초명은 경상(慶翔),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다가 철종(哲宗) 12년(1861) 동학에 입교 1863년 최제우(崔濟愚)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을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하는 한편 고종30년(1893) 이후 교조신원(敎祖伸寃) 운동에 전력했다. 선생은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 전봉준(全琫準)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北接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南接軍)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連敗)하자 영동(永同), 청주(淸州)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原州)에서 송경인(宋敬仁)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되었다. 6월5일 이종훈(李種勳) 등이 광회문 밖에 가매장된 시신을 수습 밤길을 달려와 이곳에 장사지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指)로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