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page

120 2024년 5월 순국 Inside  길 따라 얼 따라 순국 역사기행 함께 보트를 타며 감회에 사로잡 혔던 김마리아(1892-1944), 1933 년 7월 15일 인천에 있던 아지트 가 발각되자 상인으로 변장하여 서울로 진입하려다 한강인도교 입 구에서 일경에 체포되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김형선(1904- 1950), 가출옥으로 나온 직후인 1936년에 흥사단 단원들과 함께 한강인도교 앞 용양봉저정과 한강 변에서 모처럼의 야유회를 즐겼던 안장호(1878-1938) 등이 대표적 이다. 한강인도교는 1925년 을축년 (乙丑年) 대홍수 당시 북쪽끝 다 리가 물에 떠내려가는 사고가 있 었고, 1950년 6월 28일 새벽 2 시 30분에 일어난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으로 다리가 끊어지기 도 했다.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 은 6·25 한국전쟁이 벌어진 직 후 피난 중이던 서울시민과 군인 500~800명이 사망하는 충격적 인 결과로 이어져 한강인도교의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강인도교는 민주 화운동의 역사와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 면 역사가 바뀐다!’는 말이 내려오 고 있는데, 중앙대생들은 4·19혁 명, 6·3항쟁, 80년 서울의 봄, 6월 민주항쟁 등 역사의 주요한 고비 마다 시위대를 형성하여 한강인 도교를 건너 시내로 행진했다. 신불출과 신민요 ‘노들강변’ 문호월이 작곡하고 박부용이 처음 부른 신민요 ‘노들강변’은 동 작구를 대표하는 노래이다. ‘노들 강변’은 한동안 ‘작자미상’으로 표 기되어 소개되었는데, 이는 ‘노들 강변’의 노랫말을 지은 작사자 신 불출(1907-1976?)이 해방 정국에 서 월북한 인물이었던 탓이 크다. ➎ ➎  한강인도교와 노량진의 모습(1935년)  ➏  한강방어선전투기념비와 전사자명비(필자 촬영) ➏ ➐ ➐  1936년 한강인도교 앞 용양봉저정 앞에서 어린이들과 기념촬영한 안창호(가운데)와  흥사단원들  ➑  1950년 6월 28일 폭파된 뒤의 한강인도교(오른쪽) 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