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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된 이유인지, 의병장 김창곤(金蒼坤)은, 보훈처 공훈록에서는 김창곤(金昌坤, 독립장)과 다른 분이시고, 공훈록에서는 김창균(金蒼均)으로 등록되어있다.
김창균(金蒼均)은 이학상(李鶴相) 의진의 좌익장으로 전남 나주(羅州)·보성(寶城)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호남지방에서는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변보(變報)를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고광순(高光洵) 등 유학자들은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원하자는 의논을 하였다. 이 때 김창균도 비분강개함이 있었지만 거의를 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11월 일제와 친일정권에 의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이에 반발하여 광주의 기우만과 장성의 기삼연이 각기 1896년 3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김창균은 나주에서 의병진영을 결성하고 주서(注書) 이학상을 의병장에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6년 2월 9일 나주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 명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 안종수(安宗洙)를 처단하고, 박총순(朴摠巡)·여순검(呂巡檢) 등도 역시 처단한 뒤, 박시찰(朴視察)·복주사(卜主事) 등 여섯 사람을 체포하여 향교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참서관 및 총순 무리들은 역적의 도당으로서 이제 다 맞아 죽었으니 본 고을의 의병은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며 이학상을 추대하여 의진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연리청(椽吏廳)에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하였는데, 그는 좌익장을 맡고, 참모진은 사인(士人) 나병두(羅秉斗)·전현감 손응설(孫應契), 중군장은 이승수(李承壽), 우익장은 박근욱(朴根郁) 등으로 정하였다. 그리고는 군제를 정하여, 김재환·손상문·장길한·양인환·손신흥·장봉삼은 군무를 맡고, 임홍규·송종희는 서기를 맡고, 유기영은 통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나주의병은 개화파인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함으로써 친일정권의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관찰사 한기동(韓耆東)은 맨발로 서울까지 도망쳤는데 뒤에 관군을 데려와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6년 5월 5일 전남 보성에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