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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 애국지사이신 삼우재 김판봉 선생은 1901년 1월 5일에 아버지 경주김씨 정노공과 어머니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충청도에서 태어나셨다.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순지리에 정착하였다가 남양홍씨 재술의 딸과 결혼한 후 1919년 이곳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상리마을로 이거하여 생활하셨습니다. 자녀로는 2남 1녀를 두셨다. 삼우재 선생은 명문종가의 종손으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으며 민족을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통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애국지사이셨습니다. 선생은 1936년에 일본의 탄압에 저항하고자 창의를 주창하셨으며 조선독립을 계획하고 동료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듯있는 주변 선비들과 은세룡이 비밀결조직으로 창교한 황극교에 가입하여 전북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 하셨습니다. 선생의 유고인 경약사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1937년 4월에 창의사를 조직하여 전북 익산에서 비밀리에 전라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북도 본부를 설치하여 각 소임을 조직하고 삼우재 선생이 삼도창의사 총지휘장을 맡아 항일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선생은 조선이 일본제국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국체를 변혁할 것을 목적으로 조선독립을 설파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0년 10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형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골글 치르셨습니다. 해방이후에는 후학양성에 전념하셨습니다. 선생의 유고에서 제자 김세근이 발췌한 내용에 의거하면 "덕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도로서 덕을 기초로 하여 인의를 바로 세우고 예의로써 기둥을 삼아 오륜으로서 상량할 것이요 연목으로 화목하여 글을 읽히고 가문을 덕화로서 교화하라"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삼우재 선생께서 1974년 6월 3일 돌아가신 후 36년이 지나서 2010년에 고인의 항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여기 지인 및 후손의 뜻과 정성을 모아 삼우재 김판봉 선생 애국충절의 정신을 함양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