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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1월31일 토요일 12 (제229호) 기획 함양박씨문중에는이른바‘경팔립(京八立)’이라불리는인물군이있다.이는정종의외손녀로서함양박씨휘신동 (信童)의둘째아들휘중검(仲儉,秉節司猛)과 혼인한데서비롯되었는데,슬하에세아들세영(世榮)·세무(世茂)·세옹(世 죕 )을두었다.이들삼형제는오늘날구당공 ·소요공·명헌공(이하‘구소명’)종친회의파 조가되며,모두대과와소과에급제하여문중의명성을크게드높였다.더나아가이삼형제에게서태어난여덟명의 아들또한모두대과또는소과에급제하였으 니,이름끝글자가모두‘立’자를이루었다하여이를‘경팔립’이라일컫는다.이가운데명헌공(세옹)의아들휘명립 (名立)은효행으로이름이높고예학에밝아 조정의대소사와문중의의례를관장하였다.또한종방간의합의를바탕으로선세의가훈을재정립하여,후손들이 지켜야할삶의규범을명확히함으로써 가문 이명문으로이어지는기틀을마련하였다.더나아가문중제향과향촌질서를책임지던유학을기반으로한대표적인 경향사족인물이라 할 수 있어 소개해 본다. 박명립(朴名立,1531-1605)은 조선 중기 사림 사회 가지향한선비의이상과관료의책무를묵묵히실천 한 문신이다. 그는 중종 26년(1531년) 한성에서 태어 나선조38년(1605년)5월 9일,향년 75세로생을마쳤 다.본관은 함양(咸陽),자는 현부(顯夫)이다.생전에 는통훈대부(通訓大夫)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로 재직하며 국가 의례를 담당하였고, 사후에는 호종원 종공(扈從原從功)으로 책록 되어 승정원 좌승지(承 政院左承旨)에증직(贈職)되었다.그의생애는화려 한정치적성취보다는,예와도덕을근본으로삼은삶 의태도로조선사림사회의한전형을보여준다. 공의 인물됨은 그의 가계에서 비롯된다. 그의 집 안은 조선 초기부터 중앙 정계와 언관직(言官職)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대표적인 사림 명문가(士林 名 門家)였다.선조(先祖)박습(朴習)은태종과동방급 제(同榜及第)하여 팔도순찰사(八道巡察使)로서 관 원의치적을살피는출척사(黜陟事)를맡았고,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며 국가 행정의 중추를 담 당했다.이후고조박의 손(朴義孫)은 전중어 사(殿中御史)와 사헌 부 감찰(監察)로 활동 하며 왕권을 보좌하고 관료 사회를 감찰하는 언관(言官)의 역할을 수행했다. 증조 박신동 (朴信童)과 조부 박중 검(朴仲儉) 또한 관료 와 유학자의 길을 걸으 며 학문과 제도를 중시 하는가풍을이어갔다. 이러한전통은부친 명헌공(明軒公)박세옹(朴世 죕 )에이르러더욱뚜렷해진다.그는이조참의(吏曹 參議)를 지내며 인사 행정에 참여했고, 사후에는 이 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 증되었다.양관대제학은예문관과홍문관을총괄하는 학문적최고직위로,학덕과인품을두루갖춘인물에 게만허락되는자리였다.공은이러한부친의위상속 에서 인의(仁義)와 청렴(淸廉),지조(志操)를 중시하 는선비상과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를중 시하는관료적기준을자연스럽게체득하였다. 모친 남양홍씨(南陽洪氏) 역시 관료 가문 출신으 로, 부계와 모계를 아우르는 탄탄한 사회적 기반은 공의삶에안정성을더해주었다.혼인관계또한중앙 관료층 문벌과 이어져 있었는데, 이는 그의 가문이 특정붕당의정치적중심에서기보다는제도와행정 을중시하는관료네트워크에가까웠음을보여준다. 공은 어려서부터 심성(心性)이 곧고 사리를 분별 하는 능력이 뛰어나,나이에 비해 처신(處身)이 조숙 하다는평가를받았다.형제간우애(友愛)가깊었고, 삶의 근본을 효에 두었다.열한 살 되던 해 부친을 여 의었으나, 형 박정립(朴挺立)과 함께 상례를 극진히 치르며 효행으로 주변의 칭송을 받았다. 가례(家禮) 에 따라 매일 조석(朝夕)으로 부친의 음식을 올리고 진심으로 곡(哭)을 하였다는 기록은,그의 효가 형식 이아닌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부친을 일 찍여의었지만그는학문을삶의중심에두었다.스스 로독서와수양에힘쓰며,세속적명예나정치적다툼 에서한발물러나도덕과인격의완성을중시하는길 을택했다.모친과외가의어려움에도함께마음을쓰 며공감과책임을실천한경험은,그로하여금권력보 다도덕을중시하는삶의태도를더욱굳히게했다. 장성한뒤공은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로재직 하며 국가의 의례와 예제를 담당했다. 통례원은 조 선 사회가 중시하던 예치의 핵심 기관으로, 그의 재 임은 학문적 소양과 인품이 공적(公的)으로 인정받 았음을 뜻한다. 그는 눈에 띄는 정치적 발언보다는 맡은 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며,조선 사회의 질서 를떠받치는역할을충실히감당했다. 선조14년에는사촌들과함께선세유훈(先世遺訓)과 선세가훈(先世家訓)을 정리해 후손에게 전했다. 이는 개인의 수양을 가문 차원의 도덕규범으로 확장하려는 실천으로, 그의 책임감과 도학적 의식을 잘 보여준다. 더나아가공과형박정립(朴挺立:扈聖原從功臣),아들 박지기(朴知幾:扈聖原從功臣),손자박유관(朴由寬:昭 武/寧社原從功臣)에이르기까지삼대가원종공신에책 봉되었는데, 이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후(前後) 국 가적위기속에서한가문이대를이어충성(忠誠)과책 임을실천했음을상징적으로보여주는사례다. 공의 생애는 높은 벼슬이나 정치적 성취(成就)보 다,효와충,그리고도덕(道德)을근본으로삼은삶으 로요약된다.그는 말로 가르치기보다 삶으로보여준 선비였으며,조선중기사림사회가추구한인간상과 관료상의 한 전범(典範)을 이루는 인물이다. 오늘날 그의삶은공직과사회적책임,그리고개인의도덕적 자세가무엇을향해야하는지를다시생각하게한다. ―늦은출발,신중한실천 공은 젊은 시절부터 조선 중기의 정치 현실을 냉 정하게바라본인물이었다.연이은사화(士禍)와붕 당(朋黨)정치속에서수많은사림이희생되는모습 을 지켜보며, 그는 정치 자체에 깊은 회의를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그로 하여금 한동안 관직에뜻을 두지않고,학문과 수양에무게를 둔은 거에가까운삶을선택하게했다.그러나종형(從兄) 들의 거듭된 권유와 가문 내부의 요청에 따라, 그는 결국비교적늦은나이에출사의길로나아갔다. 공의관직생활은빠른승진이나정치적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언관, 왕실 근위, 지방 수령, 의 례 담당 관직을 두루 거치며, 사림 관료에게 요구되 던도덕성(道德性)과신중함,그리고위기속에서의 충성을단계적으로보여주었다. 그의 첫 관직은 1571년(선조 4) 목청전(穆淸殿) 참봉(參奉)이었다. 종9품의 하급 관직이었지만, 목 청전은 태조 이성계의 옛 집으로 왕조 개창을 상징 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공이 단순한 관직 진입이 아 니라, 왕조의 근본을 상징하는 자리에서 관료 생활 을시작했음을의미한다. 이후 그는 1575년(선조 8)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 察)로임명되어언관의길에들어섰다.사헌부는관리 의비행을바로잡고풍속을교정하는핵심기관으로, 감찰은학문과인품,청렴성이검증된인물만이맡을 수있는자리였다.이는박명립이비교적이른시기에 사림적 자질을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이어 판관과 부솔을맡으며,언관업무의실무경험도쌓았다. 1580년대에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서 익찬 (翊贊)과 익위(翊衛)를 역임하며 왕세자를 가까이 에서보좌했다.세자의신변보호와예법(禮法)교육 을 담당하는 이 직책은 무엇보다 충성과 인품이 중 시되는 자리로, 그가 행정 관료를 넘어 왕실 내부에 서도신뢰받는인물로인식되었음을보여준다. 중앙 관직을 거친 뒤 그는 지방관으로 나아가 1588 년(선조21)황해도강음현감(江陰縣監)과신천군수 (信川郡守)를 지냈다.특히 신천군수 재임 시기는 임 진왜란전후의혼란기와맞물려있었다.이시기의군 수는단순한행정책임자가아니라,전란으로피폐해 진민생을수습하고군사·조세·치안을총괄해야하는 중책이었다.박명립의 지방관경험은그가이론적사 림에머물지않고현실행정에도능했음을보여준다. 1595년(선조 28)공은 다시 중앙으로 복귀해 사복 시 사어(司僕寺 司御)로 임명되었고, 이어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를맡았다.통례원은국가의례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상례는 종3품에 해당하는 고위 직이었다.이자리는단순한품계(品階)이상의의미 를지니는대표적인청선(淸選)으로,극히신중하고 청렴한 인물에게만 허락되었다. 이는 그의 관직 생 활이 승진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인품(人品)과 신 뢰(信賴)에기반한선발의결과였음을보여준다. 공의 관직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1605년 (선조38)내려진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책록 (冊錄)이다.호성원종공신은임진왜란당시선조(宣 祖)가 의주(義州)로 피난할 때 끝까지 임금을 호종 (扈從)한인물들에게내려진칭호로,전체인원은68 명에 불과했다. 이는 전공을 세운 무신뿐 아니라, 국 가존망의위기속에서왕권과조정을지탱한문신의 충절(忠節)을기리는제도였다.이공훈으로그는생 전 통훈대부 통례원 상례(종3품)를 지냈으며, 사후 에는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 旨)에 증직되었다. 승정원 좌승지는 국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핵심 요직으로, 이는 그의 인품과 충성이 최고수준으로평가되었음을뜻한다.더나아가이공 훈(功勳)은 부친 명헌공(明軒公) 박세옹에게 이어 져,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양관대제학((弘文館, 藝 文館)으로의추증이라는가문적영예로확장되었다. 관직경로는하급실무직에서출발해언관과왕실 근위(近衛),지방수령(守令),의례(儀禮)담당고위 직을 거쳐 공신(功臣)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포괄 한다. 이는 조선 중기 사림 관료가 추구한 이상적인 삶, 곧 학문과 도덕을 바탕으로 공적 책임을 수행하 고,국가의위기앞에서는군신(君臣)의의리(義理) 를실천한인물상의한전형이라할수있다. ―만사에비친박명립의도덕적초상과실천윤리- 공의인간적면모(面貌)와내면세계를가장집약적 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낸 오봉 (五峯) 이호민(李好閔)의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단 순한 애도의 글이 아니라, 고인의 인격(人格 과 삶을 응축(凝縮)해 드러 내는 문학적(文學 的)·사상적(思想的) 기록이다. 특히 이호 민은 당대 사림 사회 를대표한문장가(文 章家)이자도덕적기 준(基準)을 제시하 던 인물이었기에, 그 의 만사는 박명립이 라는 인물을 해석하 는 데 있어 신뢰(信 賴)할 만 한 사료라 할 수 있다. 이호민은 먼저 공 을 두고 “대성(大姓) 에현자가많으니,명 공이 고상한 덕을 지 녔다”고평한다.이는 단순히명문가출신이라는사실을강조한표현이아니 다.사림 사회에서 가문은 출발점에 불과했으며,덕성 (德性)과 실천(實踐)이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이 평가는 공이 가문의 명성에 기대지않고,그에걸맞은인격적(人格的)완성도를스 스로이룩했음을전제(前提)로한도덕적평가라할수 있다.이어지는구절에서이호민은“학문을닦으매검 소한 생활에도 편안하고, 점검하여 영대를 깨끗이 했 다”고 적었다. 여기서 ‘영대(靈臺)’는 마음의 중심, 곧 내면(內面)의 도덕적 자각(自覺)을 뜻한다.이는 공의 학문이외형적성취에머물지않고,끊임없는자기성찰 (省察)과 마음의 정화(淨化)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물질적으로넉넉하지않은삶속에서도마음의안정을 잃지않았다는평가는,사림이이상으로삼았던절제와 자족의 삶을 그대로 구현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힘써서가언이족하고,온화하여도량이넓었다.” 는 평가는 그의 언행과 인간관계를 드러낸다. 가언 (嘉言)은 남을 이롭게 하는 말, 즉 진솔하면서도 도 덕적 무게를 지닌 언어를 뜻한다.그는 말을 아끼되, 할 말은 반드시 의미 있게 했고, 꾸짖기보다는 설득 하고 이끄는 방식을 택했다. 온화한 성품과 넓은 도 량(度量)은 사림 사회가 이상으로 삼은 선비상이었 으며, 이는 그가 갈등(葛藤)보다는 신뢰를 축적해 온인물이었음을말해준다. 또한 “붕우가 신의를 추중하고,높은 품격은 바람 과 티끌에서 벗어났다”는 구절은 그의 사회적 위치 를평가한대목이다.동료와벗들이그의신의(信義) 를존중했다는것은,말과행동이일치(一致)하는인 물이었다는뜻이다.‘풍진(風塵)’에서벗어났다는표 현은 정치적 혼탁(混濁)과 사사로운 이해관계(利害 關係)로부터 거리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공이 권력을 지향(志向)한 관료가 아니라,도덕을 우선시 한사림형관료(士林型官僚)였음을분명히한다. 그러나 이 만사는 일방적인 찬미(讚美)에 머물지 않는다. “가차(假借)하게도 지위가 낮아서, 제세할 재능을 헛되게 쓰였다”는 구절에서 이호민은 그의 삶에 내재(內在)한 한계(限界)를 솔직하게 짚는다. 이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시대적 조건과 정치적 환경속에서그의재능이충분히발휘되지못했음을 애석(哀惜)해하는 표현이다. 오히려 이러한 아쉬움 은 그의 잠재적 역량과 인격적 깊이를 역설적(逆說 的)으로부각(浮刻)시킨다.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으로서의 고뇌(苦惱)와 정 서(情緖)가 드러난다. “슬픔과 즐거움이 백발에 이 르고, 영욕(榮辱)을 사배에 붙였다”는 표현은, 노년 에이르러그는세속의영광과치욕(恥辱)을모두초 연하게 바라보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뜻한다. ‘사배 (蛇杯)’는 허망한 착각을 의미하는 고사로, 명예와 실패를모두허상으로여긴그의내면적성숙(成熟) 을상징한다. 말년의관직상승과건강악화를대비시키는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갑자년에 벼슬로 인해 귀(貴)해 졌으나, 젊어 보이는 얼굴에 문득 병이 침노(侵擄) 했다”는 구절은, 공적으로는 인정받았으나 육체적 으로는 쇠약해져 가는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을 담 담히 드러낸다. 이는 그가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이 는내면적계기(契機)로작용했을것이다. 만사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인간관계의 깊이는 더 욱 진솔(眞率)하다. “권애는 은혜가 편중되게 두터 웠고, 금양은 만나면 문득 풀었다”는 표현은, 그가 격식보다 정을 중시하고,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숨 기지않았던인물이었음을보여준다.이호민은끝내 “마침내 상하에서 배례를 못하고, 침문에서 애통할 뿐”이라며 가까운 벗을 잃은 개인적 슬픔을 토로한 다. 지난해 가을 강가에서 술을 나누던 기억을 떠올 리며 “오직 눈물이 뺨을 적실 뿐”이라고 맺는 대목 은,절제된문장속에깊은정서를담아낸다. 이처럼오봉이호민의만사는공을단순한관료가 아니라,검소한 삶 속에서 마음을 닦고,온화한 언행 으로 신의를 쌓으며, 세속적(世俗的) 영욕(榮辱)을 초월하려 했던 사림적 인간으로 형상화(形象化)한 다. 그는 시대적 한계로 인해 재능을 모두 펼치지는 못했으나, 바로 그 점에서 오히려 사림이 지향한 도 덕적인간형의순수성을보여준다. 이러한인간적면모(面貌)는그의삶의마지막선 택에서도분명히드러난다.형인목사공(牧使公)정 립(挺立)은 장손(長孫)으로써 적자를 두지 못해 종 통(宗統)이 끊길 위기에 놓이자, 집안에서는 입후 (立後)와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둘러싼 갈등이 이 어졌다. 관례와 관습,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공은 감정적 논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오 랜 숙고 끝에 그는 형망제급지의(兄亡弟及之義)에 따라자신이형의제사를맡겠다고결정했다. 주목할 점은, 그가 제사를 맡으면서도 재산 상속 은단호히거부했다는사실이다.제사계승(繼承)이 곧 재산 승계(承繼)를 의미하던 시대에, 그는 의무 만을 짊어지고 이익은 취하지 않았다.제사를 ‘받는’ 것이아니라 ‘감당하는’것으로 인식한그의태도는, 유교윤리에서말하는의(義)와리(利)의구분을삶 으로실천한사례라할수있다. 결국 공에게 제사(祭祀)를 잇는다는 것은 가문의 기억과도덕적부담을스스로떠안는일이었다.그는 말보다행동으로유교를살았고,제사를통해인간의 책임이어디까지확장될수있는지를보여주었다.그 의이름이오늘날까지전해지는이유는바로여기에 있다. 성취보다 성찰(省察)을, 권력보다 관계(關係) 를,명예보다 내적 평정(平靜)을 선택한 삶―그것이 박명립이라는인물이남긴가장깊은유산이다. 공의 삶과 인격은 개인의 관직 이력만으로 온전히 설명되기 어렵다. 그의 배위(配位)와 계배(繼配), 그 리고 자녀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가족사는 조선중기사림사회가중시한윤리와인간상을입체 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端緖)다.조선 시대 혼 인은단순한개인적결합이아니라,가문의도덕적전 통과학문적지향을잇는제도적장치였기때문이다. 공의 배위는 淑人 贈淑夫人 驪興閔氏로, 중앙 관 료와 언관 전통을 고루 갖춘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 민총(閔叢)은 왕실 의례와 문서를 담당한 전첨(典 籤)이었고, 외가 역시 전의 이사공(李思恭)으로 사 헌부 장령을 지낸 언관 가계였다. 이는 가문이 혼인 을 통해서도 권세보다는 제도와 예, 감찰과 청렴을 중시하는관료네트워크와결합했음을보여준다.여 흥민씨는비교적이른나이에세상을떠났으나,2남 2녀를 두어 가계를 잇고, 자녀들 역시 지방 수령과 중앙 관료 가문으로 출가하며 사림 사회의 인적 연 결망을확장했다. 이후 맞은 계배는 숙인(淑人) 贈淑夫人 朔寧崔氏 로,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최항(崔恒)의 후손에 해당 하는사림명문출신이었다.삭녕최씨가문역시대대 로문관과무관을두루배출하며학문과정치적명망 을함께갖춘집안이었다.그녀는장수하며가문의안 정을 도왔고,그에 대한 평가를 집약한 찬문(贊文)은 공의가문이지향한도덕적이상을명확히보여준다. 찬문 (贊文)은 삭녕 최씨를 두고 “금옥 같은 자질 과빙벽 같은절조를 지녔으며,재물이죄를 짓게하 지못했다”고평한다.이는단순한미덕의나열이아 니라,가문을 지탱하는 핵심 가치가 청렴과 절제,그 리고책임이었음을상징적으로드러낸다.특히재물 의 유혹을 경계하는 태도는, 앞서 살펴본 공이 형의 제사를맡으면서도재산상속을거부했던선택과정 확히 맞닿아 있다. 부부의 삶이 동일한 윤리적 기준 위에서구성되었음을보여주는대목이다. 이러한 가풍은 네 아들의 삶을 통해 각기 다른 방 식으로 계승되었다. 장자 증 호조참판(贈戶曹參判) 박지기(朴知幾)는 도학과 효행,그리고 충절을 겸비 한인물이었다.그는임진왜란이발발하자선조를호 종해 행재소까지 따랐고, 그 공으로 선릉 참봉(宣陵 參奉)에 제수되었다. 이는 전란 속에서도 왕조의 예 제와정통성을지키려했던사림적충의의실천이었 다. 비록 40대 초반에 요절했으나, 그의 충성과 학문 은아들대에이르러원종공신추증으로이어졌다. 차자 양성현감 박지지(朴知止)는 지방 수령으로 서 행정과 실무에 능한 관료였다. 특히 의술에 밝아 선조의 신임을 얻었고, 침의로서 왕실 의료에 참여 하기도 했다. 그는 중앙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보다 는, 백성과 직접 맞닿은 현장에서 사회의 안정을 담 당한 실무형 사림 관료의 모습을 보여준다. 삼자 선 교랑 박지신(朴知新)은 중앙 문관으로서 관료 사회 의 정규 경로에 진입한 인물로, 박명립 가문의 자제 들이 제도권 관료 체계 속에서 폭넓게 활동했음을 보여주는사례다.그의행적은상대적으로조용하지 만,이는가문내역할분화와현실적선택의한단면 으로이해할수있다. 사자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박지행(朴知行,호 호은)은 정의를 중시한 은거형(隱居型) 사림의 전 형에가깝다.성균관에서수학하며사마시에급제했 으나, 광해군 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권력에 타협 하지 않고 물러났다. 인조반정 이후 억울함을 씻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는 끝내 벼슬길에 복귀하지 않고 학자적 자율성과 도덕적 신념을 지키는 삶을 선택했다. 이는 관직의 성취보다 내적 원칙을 중시 한사림정신의또다른구현이었다. 종합하면, 박명립 가문의 혼인 관계와 후손들의 삶은 조선 중기 사림 사회가 단일한 성공 모델을 강 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학문과 충절, 행정과 의 료,중앙과지방,출사와은거라는서로다른선택속 에서도,이가문은일관(一貫)되게덕과절조(節操), 책임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공과 그의 가족은 말 로 도덕을 논하기보다, 생활과 선택을 통해 이를 증 명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가문은 관직 의 높낮이를 넘어, 가치와 실천으로 기억될 사림 명 가의인간상을체현(體現)한인물이라할수있다. 공의 일생을 관통(貫通)하는 키워드는 화려한 업 적이나급진적개혁이아니라,흔들림없는인격과절 제된선택이었다.그는태어날때부터심성이곧고어 질었으며, 사리 판단이 분명하고 영특(英特)함을 갖 춘인물로전해진다.형제간의우애가두터웠고,삶의 근본을효와충,그리고도덕에두어마음을닦고스스 로를성찰하는데힘썼다.이는조선중기사림이이상 으로삼았던인간상을집약적으로보여준다. 그의 수학기는 유난히 길었다. 그러나 이는 과거 급제라는 외형적 성취를 늦춘 시간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내면 성찰을 축적한 시기였다. 공은 성리학 을 출세의 수단이 아니라 삶을 단속하는 기준으로 이해했고, 세속의 권력 다툼에서 한 걸음 물러나 도 덕과 수양을 중시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이 점에서 그는 학문과 삶을 분리하지 않았던 전통적 사림의 모습을충실히보여준다. 출사이후의행로(行路)역시그러하다.하급실무 직에서 출발해 언관, 왕실 근위, 지방 수령, 의례 담 당 고위직을 두루 거친 그의 관직 경력은 특정 권력 에밀착하기보다제도와직분에충실했던관료의모 습을잘드러낸다특히임진왜란이라는국가적위기 속에서 군신의 의리를 실천하며 공신에 이르렀다는 점은, 학문과 도덕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공적책 임(公的責任)으로 전환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 다. 공을 포함해 3대가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 된 사실은, 개인의 충절을 넘어 가문 차원에서 국가 에대한책임의식이계승(繼承)되었음을말해준다. 혼인과 가계 역시 그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축 이다.배위와계배모두사림명문출신으로,이는가 문이권세보다도덕과제도를중시하는네트워크속 에자리했음을보여준다.네아들또한각기다른길- 충절, 행정, 의료, 은거-을 걸었으나, 선택의 방식은 달라도 근본의 가치(價値)에서는 일관성(一貫性) 을 유지했다.이는 조선 중기 사림 사회가 단일한 성 공 모델이 아니라, 도덕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삶의 형태를포용(包容)했음을시사한다. 말년에 공은 조응록(趙應祿:전적),신숙(申熟:寺 正), 이헌국(李憲國: 좌의정), 박동열(朴東說: 대사 성)등 당대 사림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교유하며 살 아갔다. 그는 강한 정치적 색채나 당파적 선동보다 는온건한성품과개방적인인간관계를통해공동체 안에서 균형을 지키는 역할을 했다. 정쟁의 선두에 서기보다는 관계의 조정자(調停者)이자 제도의 유 지자(維持者)로 기능(機能)했던 이러한 존재들이 있었기에, 조선 관료사회는 위기 속에서도 완전히 붕괴되지않을수있었다. 공은조선중기정치사에서이름이크게부각되는 개혁가나 대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언관·외직·근 시직·의례 관직을 아우르며 국가 운영의 여러 층위 를 성실히 떠받친 그는, 제도와 도덕으로 나라를 지 탱한관료엘리트의모습을상징적으로보여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80년 만에 14대손 준갑(埈 甲)이공의묘비를찬술해세운일,그리고다시42년 이 지나 그 아들 성호(成鎬)가 실록과 문집, 일기를 통해공의삶을재구성한일은단순한추모(追慕)를 넘어선다. 이는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가문의 기억과 사림의 가치를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며, 역 사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져 온 도덕 적유산의재확인이라할수있다. 박명립의생애는말보다삶으로도덕을증명한기 록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곱씹 어볼가치가있는조선사림의한얼굴로남아있다. /함양박씨종사연구위원장朴成鎬 예와도덕으로시대를건넌 선비박명 립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의선원세계와생애 호성원종공신록권,호성원종공신에박명립선생이기록되어있다. 상례공박명립선생의묘소,경기도고양시오금 동선영 죽계일기, 竹溪日記는 조선 선조 대의문신인조응록(趙應祿,1538 년-1623년)이임진왜란이벌어진 1592년 11월부터 1615년 12월까 지약24년동안쓴관직일기.총1 7권8책이다.이일기에상례공박 명립 선생이 죽계서원의 제의례 를관장하는기록이전해진다. 선생의생애를기록한묘비 출사와관력 성품과내면세계 혼인과가족 맺음말